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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권남용도 아니고 강요도 아니다···지인채용·광고발주 무죄?

중앙일보 2019.08.31 05:00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 박근혜 전 대통령, 최순실씨 [중앙포토·연합뉴스]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 박근혜 전 대통령, 최순실씨 [중앙포토·연합뉴스]

대통령과 청와대 경제수석이 사기업 채용과 인사에 개입하고 특정 기업과 광고 계약까지 맺게 한 사건들이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무죄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29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최순실(본명 최서원·63)씨와 안종범(60) 전 경제수석의 상고심을 파기환송하며 강요죄에 대한 해석을 원심과 달리했기 때문이다.
 

광고계약·채용·인사이동…깨알 지시한 청와대

2016년 당시 안 전 수석은 박근혜(67) 전 대통령과 단독 면담을 마치고 나오는 현대자동차 간부에게 한 회사에 대한 자료를 건넨다. 최씨가 실질적으로 운영한 ‘플레이그라운드’라는 광고 회사와 관련된 자료다. 검찰 공소사실에 따르면 안 전 수석은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플레이그라운드가 현대ㆍ기아차 광고를 할 수 있게 해보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현대자동차는 플레이그라운드가 광고를 수주하도록 했다.
 
이보다 앞서 안 전 수석은 대통령으로부터 또 다른 지시를 받는다. “이○○라는 홍보 전문가가 있으니 KT에 채용될 수 있게 KT 회장에게 연락하라”는 지시다. 안 전 수석은 KT 회장에게 “윗선의 관심 사안인데, 유명한 홍보 전문가이니 채용하면 좋겠다”는 취지로 말한다. 
 
안 전 수석이 소개한 이씨는 최씨와 관련된 사람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신모씨도 KT에 채용됐다. 채용 뒤에도 안 전 수석은 KT에 이씨와 신씨를 광고 업무를 총괄하는 보직으로 보내달라고 했고, KT는 이에 응했다. 안 전 수석은 KT 광고까지 플레이그라운드에 맡기라고 요구했고 KT는 입찰경쟁 기준을 바꿔 이 요구를 들어줬다.
 
2017년 검찰은 최씨, 박 전 대통령, 안 전 수석이 공모해 대통령·경제수석의 직권을 남용하고 이에 두려움을 느낀 기업들이 광고 발주와 채용에 응하게 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고 보고 이들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 및 강요죄로 기소했다.
 

원심, "불법행위지만…직권남용은 아냐"

 박 전 대통령과 최씨ㆍ안 전 수석의 1ㆍ2심은 사기업에 특정 인물의 채용을 요구하거나 광고를 발주하게 한 것이 직권남용죄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일반적인 직무 권한에 속하는 사항에 대해 위법ㆍ부당한 행위를 한 경우에 성립한다. 직권남용죄를 적용하려면 적어도 겉으로는 공무원의 직무집행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법원은 대통령이나 경제수석이 사기업에 지인 채용을 요구하는 것은 외관상으로도 공무원의 직무로는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법원은 세 사람의 행위가 "기업의 사적 자치 영역에 개입하고 경영 자유를 침해하는, 지위를 이용한 불법행위"라며 이들에게 직권남용이 아닌 강요죄를 인정했다. 대통령과 경제수석은 기업 활동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고, 기업이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유·무형의 불이익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위구심(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키므로 이들의 요구가 강요죄의 협박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강요로도 볼 수 없다"…원심 파기한 전원합의체

하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 행위가 강요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최씨·안 전 수석에 대한 상고심에서 전합은 "직무상 또는 사실상 상대방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직업이나 지위에 있고, 이에 기초해 상대에게 어떤 요구를 했더라도 곧바로 그것을 해악(해로움과 악함)의 고지로 볼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 공무원이 자신의 직무와 관련해 상대방에게 자신이나 제3자를 위해 재산적 이익 등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고, 상대방은 공무원의 직무에 대해 어떤 이익을 기대하며 요구에 응했다면 이는 강요죄로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앞서 세 사람이 무죄를 받은 직권남용죄와 관련한 검사의 상고는 기각됐다.
 
최씨와 안 전 수석은 원심 유죄판결 부분을 서울고법에서 다시 재판받지만, 대법원이 일부 강요죄에 대해 무죄 취지로 판단했으니 하급심은 이를 거의 그대로 따르게 된다. 같은 사건으로 따로 재판을 받는 박 전 대통령도 강요죄 부분에 무죄를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지인 채용을 요구하고 기업 계약을 요구한 행위는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직권남용죄나 강요죄로 죄를 묻기는 어렵게 된 셈이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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