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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시시각각] 창녕 조씨 선비 남명의 사직소

중앙일보 2019.08.30 00:30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숱한 의혹과 갑작스런 검찰 수사에도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버티는 이유가 자리를 향한 개인적 욕심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저와 제 가족이 고통스럽다 해서 제가 짊어진 짐을 함부로 내려놓을 수 없다”는 말이 더 두렵다. 종교적 담지자 수준의 맹목적 확신을 지닌 권력자가 그리는 개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름만 믿고 쓰다 나라 수치되면
어찌 죄가 신하에게만 있으랴"
개혁 핑계로 버티는 조국과 대비

권력의 내상은 자꾸 깊어진다. 조국 문제가 꼬이면서 문재인 정부가 내세웠던 평등·공정·정의 같은 단어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문빠’로 불리는 맹목적 지지자들이야 꿋꿋할지 몰라도, 문 정부의 ‘이성적’ 지지자들은 이미 ‘아노미’(가치관의 혼돈) 상태다. 현 정부의 임기는 아직 반 이상 남았다. 정치적 레임덕이야 다시 추스를 여유가 있지만, 저류의 가치가 무너지면 회복할 길이 없다.
 
조국의 처신은 450여년 전 같은 창녕 조씨 문중의 대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대비를 이룬다. 인물 숱한 창녕 조씨지만, 조 후보자 일가가 운영하는 웅동학원 소재지 진해 등 경남 내륙 지역 사회의 남명에 대한 자부심은 남다르다. 거듭된 사화(士禍)와 외척의 발호로 어지러운 시대, 선비 남명은 평생 출사(出仕)를 거부했다. 1555년 명종이 남명의 명성을 듣고 단성(현재 산청군 일대) 현감에 임명했지만, 그는 곧바로 사직소를 올렸다. 54세 때다. 공교롭게 지금 조 후보자 나이와 같다. (이하 인용의 출처는 경상대 남명학연구소 옮김 『남명집』)
 
“지금 저의 나이는 예순에 가깝고 학문은 어두우며 문장은 과거시험 끝자리에도 뽑힐 수 없고 행실은 물 뿌리고 비질하는 일을 제대로 해내기에도 모자랍니다.” 남명은 10여년 동안에 세 번이나 떨어진 과거 시험 경력까지 밝히며 불출사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름만 믿고 기용한다면 임금에게도 부담이 될 것이라는 경고까지 했다.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서 등용하여 훗날 국가의 수치가 된다면, 어찌 죄가 보잘것 없는 신에게만 있겠습니까.”
 
‘나아가기 어려운 첫째 이유’로 천학비재를 꼽은 남명의 겸양은 기실 ‘나아가기 어려운 두 번째 이유’를 말하기 위함이었다. “전하의 나랏일이 이미 그릇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으며 하늘의 뜻은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미 이반되었습니다.”  21살의 명종을 ‘다만 선왕의 한 외로운 아들’, 명종의 생모이자 권력 실세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 과부’로 지칭한 것은 도발이었다. 언로를 옹호한 신하들의 만류가 없었다면 남명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조국 지명 후 온 나라가 소용돌이에 빠졌지만 20여 일째 대통령은 말이 없다. 개혁의 상징이 개혁의 대상이 된 이 역설을 어떡할 것인가. 남명은 말한다. “나랏일을 정돈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정치나 형벌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전하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 유독 전하께서 종사하시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시는 바에 따라서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것이 달려 있습니다.”
 
조국 지키기에 올인하다시피 하면서 국정 운영은 실타래처럼 얽혀 버렸다. 조국을 옹호하는 데마고그(선동가)들의 언변은 오히려 진보적 가치에 대한 얄팍한 밑천만 드러내고 있다. 남명처럼 물러나며 권력의 난맥을 통박하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드나듦의 때를 놓친 후보자 자신이야말로 난맥의 원인은 아닌지, 창녕 조씨 선비 남명의 준열함을 거울삼아 돌아보길 바랄 뿐이다.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는 남명이 제자를 기르던 ‘뇌룡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뇌룡은 장자에 나오는 ‘尸居而龍見(시거이용현) 淵默而雷聲(연묵이뇌성)’이라는 말에서 따왔다. ‘죽은 것처럼 조용히 있다가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묵묵히 있다가 우레처럼 소리친다’는 뜻이다. 숱한 말빚을 남겨 스스로 발목 잡힌 후보자가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남명의 명(銘)이다.
 
이현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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