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삼성 ‘시계 제로’…초격차 깨질라 위기감

중앙일보 2019.08.30 00:05 경제 1면 지면보기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9일 국정농단 사건 상고심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원심(2심) 판결을 고법으로 파기환송했다. 사진은 이날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본사 모습. [뉴시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9일 국정농단 사건 상고심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원심(2심) 판결을 고법으로 파기환송했다. 사진은 이날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본사 모습. [뉴시스]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대단히 송구스럽다.” 삼성전자는 29일 대법원 판결 직후 낸 입장문을 통해 한껏 몸을 낮췄다. 대법원 선고를 계기로 국민들에게 반성의 뜻을 밝히고 과거의 잘못에 대해 선을 긋겠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국정농단 사건 수사가 시작된 이후 3년간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기소되고 1·2심 판결을 받는 동안 삼성의 공식적인 입장이 나온 건 처음이다.
 

이재용 부회장 판결에 첫 입장문
일단 임시TF 비상경영체제 계속
“수년간 미래 준비 집중 못했다”
최고 의사결정자 공백 재현 우려

삼성은 입장문에서 “최근 수년간 대내외 불확실성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미래 산업을 선도하기 위한 준비에 집중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앞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국가 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과 성원을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이날 대법원 판결에 따라 삼성은 시계 제로의 불확실성에 휩쌓이게 됐다. 파기환송 2심에서 어떤 판결이 나느냐에 따라 최악의 경우 총수 부재 상황을 다시 맞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삼성전자의 글로벌 1위, 초격차 전략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로 연결된다. 익명을 요구한 삼성전자 관계자는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 내부의 위기감은 훨씬 크다”고 전했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빠른 ICT(정보통신기술) 산업의 특성상, 투자나 의사결정을 순간 실기하면 3류 기업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다른 관계자는 현재 경영상황과 관련해 “실적 악화와, 일본 수출 규제, 미중 무역 갈등 격화 등이 한꺼번에 겹치는 삼중고에 휩싸여 있다”고 하소연했다. 당장 삼성전자의 상반기 매출(108조원)과 영업이익(12조원)은 지난해보다 각각 9%와 58% 감소했다. 일본산 핵심 반도체 소재 조달에 회사 전체가 사활을 걸고 나서고 있고, 한·일 갈등이 심해져 어떤 품목이 추가로 수출 규제될 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금융 쪽도 주력인 삼성생명과 삼성화재의 순이익이 상반기에 각각 48%와 36%가 감소했다.
 
익명을 요구한 삼성전자 관계자는 “중국 등 경쟁 기업의 추격은 가속화하는데, 최고 의사 결정자의 공백 장기화로 계열사나 임직원 사기가 너무 꺾여 있다”고 우려했다. 그간 이 부회장이 연루된 국정농단 사건에서 출발한 검찰 수사가 노사전략문건→삼바 증거인멸→삼성물산 합병→경영권 부정 승계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압수수색만 그간 27차례 받았고, 31명의 임직원이 기소돼 매주 1~2차례씩 재판을 받고 있다. 최고경영진과 임직원 모두가 위축돼 위기 돌파를 위한 동력이 모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안팎에선 이날 판결과 관련해 “뇌물 액수가 늘어난 것은 부담스럽지만 대통령 강요에 의한 수동적 뇌물 사건으로 정리된 건 다행”이라는 반응도 흘러나왔다. 이 부회장의 뇌물 공여 액수는 2심에서는 36억원 가량으로 판단했지만, 대법은 86억원에 대해 유죄 판결했다. 삼성 주변에선 국외 재산도피에 대해서 대법이 무죄를 확정한 만큼 항소심을 통해 이 부회장이 양형을 감량받으면 집행 유예도 기대해볼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이날 대법원 판결에도 삼성은 일단 현행대로 사업 분야별 임시 TF를 통한 비상경영 체제를 유지한다는 방침이다. 그룹내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던 미래전략실은 2017년 2월 해체됐다. 이 부회장과 박근혜 정권과의 연결 통로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나면서다. 미전실 해체 후 삼성은 각 계열별로 전자쪽은 사업지원 TF, 금융은 금융경쟁력제고 TF, 건설은 EPC강화 TF가 임시 컨트롤 타워를 맡아왔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전자·금융·건설 계열별로 TF에서 독자적으로 의사결정을 한다”며 “이 부회장은 전무나 사장급인 각 TF장들로부터 주요 현안만 보고받는 현재 시스템이 유지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부문을 넘나드는 주요 현안에 대한 의사결정은 현 시스템으로 완벽하게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이 삼성의 고민이다.
 
삼성 “판결 상관없이 투자, 일자리 창출 행보는 계속”

 
삼성전자 측은 또한 판결 결과와 상관없이 회사는 예정된 투자와 일자리 창출 행보를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2월 석방 이후 이 부회장은 현장 경영을 강화하며 내부 결속을 다지고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주력했다. 지난해 8월에는 5G(5세대) 이동통신과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반도체 등을 미래 먹거리로 선정하고 3년간 180조원을 투자해 4차산업을 선도하겠다는 비전을 내놨다. 올해 4월에는 시스템반도체에 133조원을 투자해 2030년까지 세계 1위에 오르겠다는 비메모리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다.
 
당장 정해진 계획은 없지만 이 부회장은 당분간 사업장을 방문하는 현장 경영도 그대로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이 부회장은 이달 들어서는 6일 충남 온양·천안 사업장을 찾아 반도체 패키징 사업을 점검했고, 9일엔 경기도 평택 사업장, 20일엔 광주 가전 사업장을 잇따라 찾았다. 26일엔 삼성디스플레이 아산사업장을 방문해 “지금 LCD사업이 어렵다고 대형 디스플레이를 포기해선 안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이 대법원의 원심 파기 환송에 따라 실형을 면하기 위해 다시 재판에 몰두해야 하는 처지가 되면서 이전과 같은 활발한 현장 경영은 힘들지 않겠냐는 관측도 나온다. 미국 선밸리 컨퍼런스 참석 같은 이 부회장의 글로벌 무대 복귀도 계속 미뤄질 것으로 보인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항소심 재판 준비로 기존과 같은 적극적인 경영 행보를 보이진 못할 것”이라며 “그렇더라도 삼성전자가 처한 경영 환경이 워낙 다급한 만큼 지금처럼 현장을 챙기는 행보를 보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장정훈 기자 cchoon@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