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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폐허 씨, 존재의 영도에 서다

중앙일보 2019.08.27 00:19 종합 32면 지면보기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영문학 교수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영문학 교수

폐허 씨는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잃었다. 그는 어느 순간 자기 이름을 잃고 ‘폐허’라는 다른 이름을 얻었다. 그가 쌓아온 모든 것이 어느 날 와르르 무너졌다. 어떻게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질 수 있을까. 생각해보라. 몸의 모든 장기가 망가져야 죽음이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 많은 장기 중 어느 하나의 고장만으로도 목숨을 잃는다. 폐허 씨의 경우도 그렇다. 그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음으로써 모든 것을 잃었다. 말하자면 그는 갑자기 존재의 영도(零度)에 선 것이다.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폐허 씨는 순식간에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존재가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 갑자기 사라지자 남아 있는 모든 것들이 의미를 잃었다. 가치의 수은계는 밑으로 곤두박질쳤고, 늘 높은 곳을 향해 있던 그의 눈은 볼 곳을 잃었다. 이제 어느 곳에도, 그 무엇도 그의 시선을 끄는 것이 없었다.
 

경쟁과 성취보다 더 중요한 것
한 폐허가 사랑을 만드는 광경
타자에게 들어가 꽃이 되는 모습

그가 한순간에 쑥대밭이 되었을 때 그는 세상이 마치 바닥에 누워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마치 고인돌처럼 자빠져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존재가 영도에 이르렀을 때 세상은 정지되고 적막 속에서 끝나지 않을 시간만 흐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중단된 상태를 무한정 견디는 것이 그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모든 것을 잃자마자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멀리 있는 것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무심히 하늘을 떠가던 뭉게구름이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내려왔고, 멀리 계곡에서 외로이 물을 마시던 사슴들이 놀란 듯이 몰려왔다. 바람은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으며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석양은 그의 마음속에 들어와 붉은 울음을 토해냈다. 아무 생각 없는 강아지도 슬픈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 꽃들은 그에게 일제히 얼굴을 돌렸으며, 시냇물도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폐허 씨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의 가슴엔 오로지 애통함과 위로와 사랑밖에 없었다. 시샘과 경쟁도, 미움과 싸움도, 원망과 비난도 사라진, 오로지 사랑뿐인 언어들이 폐허 씨에게 다가왔다. 세상은 그 모든 악에서 벗어나 오로지 선을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하나의 폐허가 무한의 사랑을 만드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것은 다 잃고 다 털어내고 오로지 존재의 영도에 선 자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폐허 씨는 늘 혼자였다. 구름도, 사슴들도, 바람도, 석양도, 시냇물도, 꽃들도 늘 혼자였다. 세상은 혼자인 것들이 혼자 노는 공간이었고, 어쩌다 마주쳐도 그것은 혼자들의 덧없는 만남일 뿐이었다. 그것들은 서로에게 들어가지 않았으며, 다른 것들이 자기 안에 들어오는 것을 싫어했다. 그것들은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고, 경쟁하며, 자신들의 영토를 완고하게 지켰다. 담과 철책과 가시덩굴이 혼자의 혼자임을 더욱 도와주었다. 그들은 각자의 담 안에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둑이 완전히 무너지자 다른 것들의 둑도 따라 무너지기 시작했다. 눈물이 눈물로 이어졌고, 슬픔은 서로의 슬픔이 되었다. 누군가는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다”(전도서 7:3~4)는 경전의 글을 읽어주었다. 세상에, 폐허 속에 “지혜자의 마음”이 있다니.
 
폐허 씨가 존재의 영도에 서니 보이는 것이 또 있었다. 그것은 성취와 승리와 윤리와 사상과 이념으로 대문자 현존(現存·Presence)에 절대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런 가치들의 허무함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이런 가치들의 절대성에 대한 부정의 생각이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폐허의 고통을 이기기 힘들 때, 한 알의 신경안정제가 순식간에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을 수차례 경험했다. 이 대목에서 폐허 씨는 다시 한번, 완전히 깨졌다. 그가 지금까지 그렇게 치열하게 쌓아온 정신의 힘이 작은 알약 하나만도 못하다니. 그의 ‘잘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보다 위대한 것은 경계와 경쟁과 질투를 다 버리고 그에게 조건 없이 다가온 사랑의 메시지들이었다. 그의 안으로 마구 치고 들어오는 거친 사랑의 힘에 그는 완전히 굴복했다. 그것은 그 잘난 돈도, 물질도, 학력도, 지위도, 예술도, 정신의 고상함마저도 다 무너뜨리는 엄청난 힘이었다.  
 
그것들은 폐허 씨의 가슴 속에 들어와 거대한 군락을 이루었다. 폐허 씨도 그 모든 것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꽃이 되었다. 그는 조금씩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영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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