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영준의 시선] 지금 청와대엔 최명길이 없다

중앙일보 2019.08.26 00:16 종합 28면 지면보기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일본이 경제보복의 제1탄인 반도체부품 수출규제 카드를 뽑아든 직후인 지난달 중순께 들은 이야기다. 외교부 고위당국자가 “(8월 초로 예정된) 화이트리스트 배제 이외에도 걱정거리가 있다”며 당시로선 아직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았던 지소미아 연장 문제를 거론했다. 일본이 수출규제의 이유 중 하나로 ‘안보 우려’를 내세웠으니 불똥이 지소미아로 튀지 말란 법이 없다는 얘기였다. 경제로 번진 한·일 갈등이 안보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지 않고 지소미아가 무사히 연장되기를 바라는 게 당시 외교부의 속내란 걸 읽을 수 있었다.
 

8·15 뒤 일주일 만에 주화론 소멸
대통령·참모 전원 주전론 회귀
이유 석연찮아 ‘조국 덮기’설 불러

실제로 지소미아 운용을 담당하는 국방부를 비롯, 안보 전문가들의 속내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2년여간의 운용경험에 비춰볼 때 군사작전의 관점에서는 지소미아가 효용이 있다는 게 필자가 만난 현역 간부를 포함한 여러 사람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지소미아 발효 이후 정보교환 실적은 주로 북한 미사일의 궤적 분석에 집중되었는데 한국은 저고도 상승단계, 일본은 탄착 단계에서 각각 장점이 있어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충분히’ 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경두 국방장관의 국회 답변이 지소미아의 유용성을 인정한다. 그는 “도움이 되지 않으면 바로 파기하면 된다. 도움이 되는 게 있으니 신중히 검토하는 것”이라며 “북한 핵실험 등에서 우리가 캐치 못 하는 정보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야당 의원의 집요한 추궁끝에 나온 이 솔직한 발언에 진실이 담겨 있다.
 
실제로 일본 정보를 제공받은 사례가 있는지 모르지만 잠수함 청음(聽音)식별 능력은 일본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는 게 정설이다. 수년 전 한 세미나에서 만난 일본 전문가로부터 “일본은 북한이 보유한 잠수함의 모든 함종(艦種)의 식별 데이터를 갖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뒤 국내 전문가로부터 똑같은 말을 들었다.
 
이처럼 일선 정부 부처에는 지소미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걸 깬 건 청와대의 강경 주전론(主戰論)자들이다. 어떤 전쟁이든 주전론과 주화론(主和論)이 있게 마련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8·15 경축사는 결사항전의 주전론을 내려놓고 주화론에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일본에 하루 먼저 경축사 내용을 알려주고 광복절 당일 고위급 특사를 일본에 보냈다. 지소미아도 협정의 틀은 유지하되 정보교환은 잠정 중단하는 식으로 대응할 것이란 예상이 대세였다.
 
그런 기류가 일주일만에 확 뒤집혔다. 22일 지소미아 종료 결정으로  주화론은 소멸되고 주전론은 더 강경해졌다. 일본이 문 대통령의 경축사 등 노력에 ‘국가적 자존심’까지 훼손될 정도의 무시로 일관했다는 게 청와대가 내세운 이유다. 설사 그랬다고 해도 지소미아 종료로 맞설 일은 아니었다고 본다.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미·일 안보협력과 동북아 안보지형이란 훨씬 더 큰 틀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타난 반응들이 이를 입증한다.
 
열받은 미국이 실망과 불만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동안 득의의 미소를 짓는 사람들이 있다. “군사 안보 협력을 개시하거나 중지하는 것은 주권 국가의 자주적 권리”라고 한 중국 외교부 대변인 논평은 시진핑 주석의 웃음과 오버랩된다. 한국이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비해 부득이하게 사드를 배치했다는 설명은 들은 척도 않던 중국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한·미·일 군사동맹을 맺지 않겠다는 등의 ‘3불 약속’에 이은 또 하나의 떡이 굴러왔으니 왜 웃지 않겠는가.
 
북한은 그저께 ‘신형 초대형 방사포’ 2발을 발사했다. 김정은이 쾌재를 부르며 쏘아올린 축포이자 내친 김에 한·일의 대응태세를 점검해보려는 시험용이었을 터다.
 
최대의 미스터리는 이런 셈법을 모를 리 없는 청와대가 종료 결정을 내린 이유다. 그것이 석연치 않기에 ‘조국 덮기’란 억측이 나돈다. 청와대는 매일같이 여론 조사를 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의 호응을 얻는 것은 주전론이다. 적에게 꼬리를 내리는 비겁한 자의 논리로 비치는 주화론은 인기가 없다. 지소미아 문제는 고도의 전문성과 기밀을 요하는 것이라 정보 접근이 제한된 일반국민의 여론, 더구나 온 나라가 반일 열기에 휩싸인 상태에서의 여론에 기대 결정할 일이 아니다.
 
남한산성에서 역적으로 몰려가며 주화론을 주창했던 최명길은 지금의 청와대에서 찾을 수 없다. 지소미아 종료는 문재인 대통령과 주요 참모 전원이 주전론으로 똘똘 뭉친 결과였을 것이다. 한때 성밖 유생들의 상소에 잠간 귀기울였다가 궁내 중신들의 “아니되옵니다”에 이내  돌아선 것, 그것이 바로 1주일만에 시효를 다한 주화론의 소멸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예영준 논설위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