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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철거한‘돈의문', 광고회사가 왜 복원에 앞장 섰나

중앙일보 2019.08.24 05:00
지난 20일 서울 정동사거리에선 디지털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이 공개됐다. 104년 전 일제가 철거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돈의문이 증강현실(AR)과 가상현실(VR) 기술을 통해 한 세기 전 모습으로 복원된 것. 디지털 돈의문 복원에는 서울시ㆍ문화재청ㆍ우미건설ㆍ제일기획이 참여했다.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알겠는데, 건설사와 광고회사는 여기에 왜 나섰을까.   
 

104년 사라진 돈의문(서대문) VRㆍAR 기술로 부활
광고기획사 선(先)제안에, 광고주ㆍ시ㆍ정부 호응
제일기획 "광고 개념 달라져…사회적 영향력에 가치"

22일 찾아간 정동사거리 앞에서 스마트폰으로 돈의문 AR 애플리케이션(앱)을 실행했다. 강북삼성병원과 돈의문박물관마을 건물 앞에 웅장한 돈의문이 나타난다. 빨강ㆍ초록ㆍ파랑이 어우러진 돈의문 단청은 햇빛에 따라 시시각각 미묘하게 다른 빛깔을 냈다. 사거리 모퉁이에 위치한 돈의문박물관에서는 VR 콘텐츠로도 돈의문을 구석구석 체험해볼 수 있었다. 100여 년 전 한양 성곽 주변을 재현한 VR 콘텐트 안에서 돈의문 누각에 오르니 한양 도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서울 종로구 정동사거리에 증강현실 기술로 복원된 돈의문(서대문). 서울시ㆍ문화재청ㆍ우미건설ㆍ제일기획은 104년 전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가 전차 건설을 이유로 철거한 돈의문을 디지털 기술로 복원했다. [사진 제일기획]

서울 종로구 정동사거리에 증강현실 기술로 복원된 돈의문(서대문). 서울시ㆍ문화재청ㆍ우미건설ㆍ제일기획은 104년 전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가 전차 건설을 이유로 철거한 돈의문을 디지털 기술로 복원했다. [사진 제일기획]

 
디지털 기술로 돈의문을 복원하자는 아이디어는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에서 나왔다. 장종철 제일기획 비즈니스앤써(Answer) 팀장의 생각이었다. 장 팀장은 ”흥인지문(동대문)ㆍ숭례문(남대문)ㆍ숙정문(북대문)은 실물이 남아있는데, 왜 돈의문은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 내부 신사업 공모전에 냈다”며 “이후 건축물의 역사성에 공감하는 광고주를 찾았고, 바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2017년 4월 제일기획 내부에 생긴 비즈니스앤써팀은 사내 다른 20여개 광고 비즈니스팀과 달리 광고주에게 먼저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방식으로만 일한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직접 다루는 광고 기획안은 내지 않는다. 참신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해 사회에 긍정적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기획안을 만들고, 이와 잘 어울릴만한 광고주에게 ‘선(先)제안’하는  방식이다. 장 팀장은 ”수년 전부터 전 세계 광고업계에서 광고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며 “(기업과 소비자의)사회적 참여를 중요하게 여기고 ‘착한기업’에 주목하는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소비자로 부상하면서 기존 광고와 다른 새로운 시도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1899년 5월 개통된 전차가 돈의문(서대문)을 통과하는 모습. 돈의문~흥화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을 유럽식 붉은 전차가 매일 10분 간격으로 운행됐다. 일제는 전차 선로를 넓히려는 목적으로 1915년 돈의문을 철거했다. [사진 서울시립대 박물관]

1899년 5월 개통된 전차가 돈의문(서대문)을 통과하는 모습. 돈의문~흥화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을 유럽식 붉은 전차가 매일 10분 간격으로 운행됐다. 일제는 전차 선로를 넓히려는 목적으로 1915년 돈의문을 철거했다. [사진 서울시립대 박물관]

 
실제로 광고계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칸 광고제는 2015년부터 성(性) 불평등과 선입견을 깨는 광고들을 시상하는 부문(Glass:The Lion for Change)을 만들고, 2018년에는 UN의 지속가능 개발 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에 부합하는 광고들을 따로 시상하는 부문을 두고 있다.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에 힘을 실어주자는 취지다.      
 
장 팀장의 비즈니스앤써팀은 돈의문에 앞서 광고인 듯 광고 아닌 듯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비상교육ㆍ서울대 김동일 교수팀과 함께 10대들이 스스로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마음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마음 교과서’를 만들어 서울 소재 중학교들에서 실제 시범 교육을 했고, 현재는 정식 교과서 등록을 추진 중이다. 또 골프를 활용한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교육부에 자유학기제 프로그램으로도 등록했다.  
 
돈의문 프로젝트의 경우 장 팀장은 AR 기반 게임인 ‘포켓몬고(Go)’처럼 ‘돈의문 AR’을 만들자는 기획안을 들고 광고주를 찾았다. 건축과 정보기술(IT)을 결합하는 방식이나 문화재의 역사적 가치에 공감하는 광고주여야 했다. 제안을 받은 중견건설사 우미건설이 바로 손을 잡았다. 이춘석 우미건설 홍보팀장은 “역사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더 나은 공간의 가치를 창조한다는 우리 기업의 사명과 딱 맞는 프로젝트여서 함께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서울시도 적극적이었다. 사실 서울시는 돈의문 실물 복원을 시도했다가 2010년 교통난과 부지 매입 문제에 부딪혀 계획을 접어야 했다. 전문가들도 나섰다. 처음엔 실물이 아닌 디지털로 문화재를 복원한다는 게 가능할지 의구심을 가졌지만 한국의 IT로 도전해보자는 데 뜻을 모았다. 문화재청은 김왕식 명지대 건축학과 교수 등 문화재 복원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을 지원해 디지털로 돈의문의 원형을 복원하는 데 힘썼다.  
 
돈의문을 디지털로 복원하자는 아이디어를 광고주와 서울시, 문화재청에 제안해 실행에 옮긴 제일기획 비즈니스앤써팀 장종철 팀장. [사진 제일기획]

돈의문을 디지털로 복원하자는 아이디어를 광고주와 서울시, 문화재청에 제안해 실행에 옮긴 제일기획 비즈니스앤써팀 장종철 팀장. [사진 제일기획]

장 팀장은 “사라진 문화재를 VR과 AR로 구현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참고할 자료도 없었다”며 “국내 IT 기업들의 뛰어난 기술력으로 콘텐트를 제작했다”고 말했다. AR 복원을 목표로 시작한 프로젝트는 점점 커져서 VR 체험과 길거리에서 손쉽게 스크린을 터치해 돈의문을 볼 수 있는 키오스크, 실물 크기의 14분의 1로 만든 모형 돈의문(디오라마) 등 다양한 콘텐트로 이어졌다. 영화 ‘안시성’의 그래픽을 만들었던 위지윅스튜디오가 정동사거리 복판에 AR로 돈의문을 세웠고 VR 게임 콘텐트로 유명한 스코넥엔터테인먼트가 100여 년 전 돈의문을 VR로 구현했다.

 
반응도 긍정적이다. 정동사거리에 위치한 돈의문 VR 체험관에선 20일 이후 매일 150명 이상이 방문해 돈의문을 가상현실에서 만나고 있다. 이날도 방학을 맞아 아이들을 데리고 온 학부모들이 많았다. 제일기획은 돈의문에서 시작된 디지털 문화재 프로젝트를 서울 사대문 일대 전체로 확장할 계획이다. 장 팀장은 “현재 서울 사대문 일대를 모두 VR로 구현하고 이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콘텐트를 만들고 있다”며 “아이디어 하나로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사회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박수련 기자 park.sury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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