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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자합의·양적완화…미국 위기 때마다 환율전쟁, 신흥국에 직격탄

중앙선데이 2019.08.24 00:27 650호 12면 지면보기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주요국의 통화가치는 금에 묶여 있었다. 금이라는 공통의 가치 척도가 존재했기 때문에 국가 간 교역이나 자본 이동에 환율과 관련된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금본위제 폐지 이후 대두된 문제는 환율이다. 환율을 인위적으로 바꾸면 교역과 자본 거래에서 뚜렷한 우위를 누릴 수 있기에 금본위제 폐기 이후의 자본주의는 환율과 관련된 갈등과 투쟁의 역사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환율전쟁에는 늘 미국이 개입했다. 절대적 권위를 가졌던 금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지난 100여 년간 달러가 기축통화의 지위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환율전쟁은 여러 외피를 쓰고 나타났지만 기본적으로는 달러 가치와 관련된 갈등이었다. 5차례 벌어진 환율전쟁은 대공황 직후였던 1930년대에 시작됐다.
  

세계경제 뒤흔든 5차례 쩐의 전쟁
금본위제·브레튼우주 체제 파기 후
환율 급변하고 외환위기도 발생

각자도생 식 자국 이기주의 만연
중국, 위안화 약세로 미국에 맞서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1 보호무역주의 비극
 
1929년 주식시장의 붕괴로 시작된 대공황은 신생국 미국이 직면한 최대의 시련이었다. 무기력했던 후버 대통령을 누르고 백악관에 입성한 루스벨트 행정부는 불황 타개를 위한 대책으로 금본위제에 손을 댄다. 1933년 미국은 대내적으로 금본위제를 중단한다. 달러의 금태환이 중단됐고, 미국 국민들은 보유 중인 금을 온스당 20.6달러에 국가에 팔도록 의무화했다. 다만 다른 나라와는 금본위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미국 외 많은 나라가 금본위제를 포기하자 방향을 틀었다. 1931년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 스웨덴, 일본이 금본위제를 포기하면서 자국 통화에 대해 사실상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미국도 이에 대응해 1934년 정화정비법을 만들어 온스당 20.6달러였던 금 가격을 35달러로 올렸다. 달러를 일시에 69%나 평가절하시키면서 본격적으로 환율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프랑스와 벨기에 등도 1936년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자국 통화가치를 경쟁적으로 절하시키는 행위는 궁극적으로 누구에게도 도움이 못 됐다. 이런 각자도생 식의 자국 이기주의는 2차 세계대전으로 폭발하게 된다.
  
2 닉슨 쇼크
 
2차 세계대전의 승자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의 전쟁 특수를 제대로 누리면서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고, 이를 기반으로 금을 사들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세계에서 유통되던 금의 80%가 미국 재무부 금고에 쌓여 있었다. 독일과 일본의 패배가 확실시되던 1944년 미국은 44개국의 대표를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 초대한다. 브레튼우즈 회의에서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국제통화기금(IMF) 설립이 결정됐다. 미국은 또 달러를 금 1온스당 35달러에 고정시켰다. IMF 가맹국들은 이를 기준으로 달러에 대한 자국 통화의 환율을 고정시켰다(1% 이내 변동 허용). 미국은 다른 나라가 달러를 가져와 금과 교환을 요구하면 이에 응해야 했다.
 
68년 미국의 경상수지가 적자로 반전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 국방비 지출이 크게 늘어났고, 북유럽식 복지국가 모델을 지향했던 존슨 행정부의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 탓에 재정 지출도 불어났다. 정부 지출 확대에 따른 통화증발로 물가상승률이 치솟기 시작했다. 국제 상품시장에서 금 가격은 달러당 60달러대로 치솟았다. 미국과 각을 세우고 있었던 드골의 프랑스는 무역수지 흑자로 벌어들인 달러를 계속 금으로 바꿔갔다. 35달러를 주고 받아온 금 1온스를 국제 상품시장에서 60달러에 팔 수 있었으니 브레튼우즈 체제가 지속되기 어려웠다. 1971년 8월 15일 일요일 저녁 닉슨 대통령은 인기 서부극 보난자 방송을 일시 중단하고 긴급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달러의 금태환 중단과 수입품에 대한 10%의 관세 부과가 발표의 요지였다. 이런 ‘닉슨 쇼크’로 고정 환율의 세상은 사라졌다. 세계 경제는 환율 급변과 반복적인 외환위기 발생이라는 격랑에 휘말리게 된다.
  
3 플라자합의
 
두 차례 오일 쇼크 등으로 미국은 1970년대 후반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경험했다. 이 무렵 폴 볼커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연방기금금리를 20%로 인상했다. 이에 따라 달러 가치는 강세로 반전됐고, 이런 흐름이 85년까지 이어졌다. 다만 미국 경제는 기업 경쟁력 약화에 따른 경상수지 악화, 레이건 행정부의 과도한 군비 지출에 따른 재정수지 악화로 쌍둥이 적자에 직면했다. 이와 달리 일본과 서독은 패전의 트라우마를 딛고 70년대 중반 이후 약진하기 시작했다.  
 
결국 85년 9월 미국은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서방 선진 5개국 재무장관 회의를 소집한다. 이 자리에서 대미 무역흑자 규모 1위인 일본의 엔화와 2위인 서독의 마르크화를 달러 대비 절상시키기로 합의했다. 냉전의 시대라 자본주의 버팀목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일본 수출은 1986년 마이너스(전년 대비)로 반전되기 시작했다.
  
4 양적완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제로금리 정책도 모자라 양적완화라는 비정상적인 통화정책을 썼다. 미국이 금리를 낮추거나 양적완화를 하면 달러를 구하기 쉬워지지만 이런 ‘이지머니(easy money)’로서의 달러를 덥석 물었다가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서 달러 가치가 높아지는 국면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70년대 중동 산유국들은 달러를 미국 은행에 예치했고, 중남미 국가에 낮은 금리로 대출했다. 중남미 국가들은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폴 볼커 의장이 고금리 정책을 쓰자 달러 빚을 낸 중남미 국가들은 강달러 직격탄을 맞았다. 82년 브라질을 시작으로 줄줄이 외채위기에 직면했다.
 
이런 경험 탓에 기도 만테가 브라질 재무장관은 2010년 G20 회의에서 선진국의 양적완화에 따른 유동성 공급 확대는 신흥국 경제의 안정성을 해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경고는 현실이 됐다. 미국의 양적완화 국면에서 이지머니 달러를 쉽게 받아들인 신흥국들은 2013년 버냉키의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 시사 발언 이후 미국 금리와 달러 가치가 상승하자 극심한 외화 유동성 위기를 경험했다. 브라질 헤알화도 큰 폭의 평가절하라는 후유증을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브라질 채권 투자자들도 막대한 환차손을 입었다.
  
5 미·중 충돌
 
최근의 미·중 갈등은 환율전쟁에만 국한되지 않지만, 환율을 둘러싼 이견도 주요한 요소 중 하나다. 미국은 대미 무역수지 흑자 규모가 가장 큰 중국 위안화의 평가절상을 요구하고 있다. 플라자합의 이후 쇠락한 일본을 반면교사로 삼은 중국은 미국의 환율조작국 지정에도 오히려 위안화 약세로 맞서고 있다. 다만 중국의 아킬레스건은 과도한 외화표시 부채다.  
 
위안화 약세 유도는 중국 수출에는 도움이 되지만 외화표시 부채 규모가 큰 중국 기업에는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7위안대의 위안·달러 환율 유지가 중국인민은행의 본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지금까지는 외환시장 개입으로 위안·달러 환율이 7위안대로 올라가는 것을 적극 막아왔다.
 
미·중 갈등은 미국에 유리한 형국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닉슨 쇼크, 플라자합의, 양적완화 국면에서의 환율전쟁 발단은 취약한 미국 경제였다. 지금은 다르다. 미국 경제도 순환적 경기 하강 리스크에 노출돼 있지만 탄탄한 편이다. 과거 환율전쟁의 타깃이 됐던 국가들과는 달리 중국은 고분고분하지 않지만, 미국의 내구력도 과거보다 강해졌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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