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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 부드러운 ‘마구’ 힘의 시대 MLB를 지배하다

중앙선데이 2019.08.24 00:02 650호 25면 지면보기

김식의 야구노트 

올 시즌 MLB 최고 투수로 우뚝 선 류현진은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활용하는 ‘공간 싸움’, 타자들의 타이밍을 빼앗는 ‘시간 싸움’에 모두 능하다. [USA TODAY=연합뉴스]

올 시즌 MLB 최고 투수로 우뚝 선 류현진은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활용하는 ‘공간 싸움’, 타자들의 타이밍을 빼앗는 ‘시간 싸움’에 모두 능하다. [USA TODAY=연합뉴스]

올 시즌 류현진(32·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피칭은 눈부시다. 그런데 야구팬들이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는 역사적인 ‘홈런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다.
 

올 시즌 MLB 역대급 ‘홈런 인플레’
투수들은 시속 160㎞ 강속구 경쟁

리그 하위 8% 느린 공이지만
경계에 걸치게 던지는 면도날 제구
주무기만 4가지, 다양한 구종으로
평균 자책점 1점대 최고의 피칭

올해 MLB 정규시즌에선 6700개가 넘는 홈런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2017년 나왔던 단일 시즌 최다 홈런(6105개)기록을 갈아치울 게 확실하다.
 
홈런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공의 반발력이 높아졌다. MLB 최고 투수 중 하나인 저스틴 벌랜더(36·휴스턴 애스트로스)는 “올해 사용되는 공은 완전히 조작됐다. 말도 안 되는 공”이라고 주장했다. 22일 기준으로 15승 5패(아메리칸리그 2위), 평균자책점 2.77(아메리칸리그 2위)을 기록 중인 그는 홈런을 33개나 맞았다.
 
다른 원인은 타구 발사각의 변화다. 2016년 이후 MLB에서는 ‘뜬공 혁명(Fly Ball Revolution)’이라 불리는 변화가 지속되고 있다. 타자가 친 공이 25~30도의 각도로 날아가면 최고의 생산성(득점)을 얻는다는 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다. 강한 플라이볼을 치는 타자들이 늘어났다.
 
‘홈런의 시대’에 더 빛나는 투구
 
홈런이 쏟아지는 MLB에서 투수들의 무기는 힘과 스피드다. 올 시즌 MLB 투수들의 패스트볼(직구) 평균 속도는 시속 150㎞에 이른다. ‘꿈의 속도’로 여겨지던 160㎞의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들도 여럿이다.
 
MLB를 지배하는 류현진

MLB를 지배하는 류현진

투수의 힘과 타자의 파워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 시기에 류현진이 MLB 최고 투수로 우뚝 섰다. 총 400명 가까운 MLB 투수 가운데 류현진은 유일하게 1점대 평균자책점(1.64)을 기록 중이다. 올 시즌 류현진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145㎞다. 미국 통계 사이트 ‘베이스볼서번트’에 따르면, 류현진의 패스트볼 구속은 하위 8%에 속한다.
 
중계 기술의 발전 덕분에 팬들은 류현진의 공이 보더 라인(스트라이크와 볼의 경계선)을 예리하게 공략하는 걸 볼 수 있다. 고난도의 피칭을 하면서도 그는 볼넷을 거의 내주지 않는다. 9이닝 당 볼넷 허용(1.09개) 기록에서 류현진은 단연 1위다.
 
류현진의 피안타율은 0.223으로 MLB 전체 16위다. 뛰어난 기록이지만 특급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상대 득점권(주자가 2루나 3루에 있는 경우)에서 류현진의 피안타율은 0.147로 MLB를 통틀어서 가장 낮다.
 
기계처럼 완벽한 제구를 한다는 건 과장이지만, 류현진이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건 틀림없다. 홈런도 잘 맞지 않는 편이다. 올해 피홈런 12개도 선발 투수 중에선 적은 편(143위)이다.
 
류현진의 4가지 구종

류현진의 4가지 구종

빠르지 않은 공은 강하게 때리기 쉽다. 그러나 류현진은 정타(正打)를 잘 맞지 않는다. 통계 사이트 ‘팬그래프닷컴’은 올 시즌 류현진이 허용한 하드 콘택트(잘 맞은 타구) 비율을 35.4%로 집계했다. 미드 콘택트(평균의 타구)는 43.8%, 소프트 콘택트(빗맞은 타구)는 20.7%다.
 
MLB 최고 투수에게 주는 사이영상을 세 차례나 수상한 맥스 셔저(35·워싱턴 내셔널즈)는 하드 콘택트 36.7%, 미드 콘택트 44.1%, 소프트 콘택트 19.2%를 기록했다. 타자들은 최고 158㎞ 강속구를 뿜어내는 셔저의 공보다 류현진의 투구 공략을 더 어려워하는 것이다.
 
류현진이 던지는 변화구는 크고 빠르게 꺾이지 않는다. 관중석이나 TV 앞에서 보는 팬들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160㎞ 강속구를 받아쳐 홈런을 날리는 타자가 류현진의 공을 왜 못 치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류현진의 공을 가까이 보는 타자의 시각에서는 효과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 결과 류현진의 공을 때리면 땅볼이 많이 나온다. 올 시즌 그가 잡아낸 땅볼 아웃은 187개(전체 7위)였다. 류현진보다 많은 땅볼을 유도한 6명은 평균자책점 3.63~4.71에 이르는 투수들이다. 수준급 투수 중에서는 류현진의 땅볼 유도 능력이 가장 탁월하다.
 
타자들은 뜬공을 때리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류현진을 만나면 땅볼 아웃으로 물러나는 경우가 많다. 스윗 스폿(방망이 중심)을 살짝 피하는 기술이 예술적이다. 그렇게 소프트 콘택트를 유도하는 힘이 류현진의 ‘소프트 파워’다.
 
류현진 투구의 핵심은 정확성과 다양성이다.
 
스피드가 조금 떨어져도 보더 라인을 파고드는 공은 잘 때려내기 어렵다. 우선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타격하기로 마음먹어도 바깥쪽 꽉 차거나, 몸쪽으로 바짝 붙은 공은 좋은 자세로 타격하기가 어렵다. 류현진의 정확한 제구는 타자와의 ‘공간 싸움’에서 승리하는 최고의 무기다.
 
그의 컨트롤은 안정적인 폼에서 나온다. 왼손 투수인 그가 왼발을 힘차게 내딛고, 허리를 빠르게 회전한 뒤, 간결하게 팔을 돌리는 흐름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어린 시절부터 만들어온 부드러운 자세는 일정한 릴리스 포인트(공을 놓는 지점)를 만든다.
 
그의 제구력은 2013년 다저스에 입단했을 때부터 최고 수준이었다. 당시 지구 최고의 투수로 불렸던 클레이턴 커쇼(31)는 “류현진은 침대에서 막 일어나서도 원하는 곳으로 공을 던질 수 있다”고 감탄했다. 로버츠 감독은 “류현진은 달에서도 던질 수 있다”고 했다.
 
공간과 시간을 이용한 ‘싸움의 기술’
 
류현진을 격려하고 있는 데이브 로버츠 다저스 감독(왼쪽). [AFP=연합뉴스]

류현진을 격려하고 있는 데이브 로버츠 다저스 감독(왼쪽). [AFP=연합뉴스]

정확한 제구력에 다양한 구종까지 갖추면서 류현진은 MLB 최고의 투수가 됐다. 2013년까지 류현진은 패스트볼과 체인지업 위주로 던지는 투피치(two-pitch) 투수였다. 2014년 체인지업 위력이 떨어지자 슬라이더 비중을 높였다. 2015년 왼 어깨 수술을 받은 뒤에는 커브와 컷패스트볼을 차례로 장착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류현진의 주 무기는 4개로 늘었다. 투구의 기본인 패스트볼 비중이 40%다. 오른손 타자 시야 바깥으로 달아나는 체인지업(28%)과 몸쪽으로 파고드는 컷패스트볼(20%)을 효과적으로 구사한다. 시속 115㎞의 느린 커브(12%)를 던지기도 한다. 허구연 MBC 해설위원은 “MLB에서도 4가지 공을 수준급으로 던지는 투수는 거의 없다. 타자 입장에서는 대응하기 정말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뛰어난 투수라고 해도 대표적인 구종이 2가지 정도다. 3, 4번째 구종 구사율은 10% 이하다. 같은 투구 폼에서 여러 가지 공을 던지는 건 더욱 어렵다. 그러나 류현진은 부상·부진과 싸우면서 새 무기를 하나씩 늘려갔다. 부상에서 회복한 지금도 다양한 구종을 유지하고 있다.
 
투피치 투수와 상대할 때 타자는 OX 퀴즈를 푸는 셈이다. 류현진과 상대하는 건 ‘사지선다’ 문제와 맞닥뜨리는 것이다.
 
게다가 4개 항목이 모두 정답 같다. 4가지 구종 모두 정확하게 날아들고, 변화 각이 좋다. ‘팬그래프닷컴’의 구종가치(MLB 투수 평균이 0)를 보면, 류현진의 패스트볼(5.7), 체인지업(20.1), 컷패스트볼(4.3), 커브(2.0) 모두가 수준급이다.  다양한 구종은 타자와의 ‘시간 싸움’에 유용하다. 속도와 각도의 변화가 타자들의 타격 타이밍을 빼앗는 것이다.
 
게다가 류현진은 같은 구종이라도 미세한 변화를 줄 수 있다. ‘투수들의 무덤’이라는 쿠어스필드(콜로라도 로키스 홈구장)에서 지난 1일 6이닝 무실점 했을 때 그의 비기(祕技)는 슬라이더였다.
 
류현진은 2017년 이후 슬라이더를 던지지 않았다. 대신 슬라이더보다 빠르고 덜 꺾이는 컷패스트볼을 활용했다. 6월 29일 쿠어스필드에서 4이닝 7실점으로 부진했던 류현진에게 지난 1일에는 새로운 무기가 필요했다. 콜로라도 타자들의 류현진 공략 매뉴얼에는 슬라이더가 없었다. 그래서 중요할 때마다 헛스윙을 했다. MLB의 레이더 장비(스탯캐스트)도 그의 슬라이더를 컷패스트볼로 집계했다. 로버츠 감독도 “컷패스트볼이 좋았다”고 했다. 단 한 경기를 위한 구종 변화가 첨단 기계와 감독까지 속인 것이다.
 
언뜻 보면 류현진의 피칭은 쉬워 보인다. 안정된 폼으로, 그리 빠르지 않은 공을, 쉽게 던지는 것 같다. 그러나 류현진은 시간과 공간을 아주 영리하게 이용하고 있다. 그와 상대하는 타자는 어떤 공이 어디로 날아올지 몰라 애를 먹는다. 어려운 싸움을 쉽게 하는 기술, 그게 류현진의 ‘소프트 파워’다. 세계 최고의 야구 선수들이 경쟁하는 무대에서 류현진이 압도적 1위로 우뚝 선 비결이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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