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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 등긁개, 명품 재킷, 전용 마차…'최고급병 환자' 쇼팽

중앙일보 2019.08.23 12:00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38)

쇼팽을 그린 폴란드 지폐. 액면가는 5000 즈워티쉬(Zlotych). 1982년 발행. 폴란드 화폐는 1995년 만분의 일로 평가절하되었고, 이름은 즈워티(Zloty)로 바뀌었다. 위 지폐는 그 이듬해인 1996년까지 유통되었다. 현재 1 즈워티의 가치는 약 310원이다. 참고로 폴란드는 2004년 유럽연합에 가입했다. 하지만 유럽연합의 공식화폐, 유로(Euro)대신 자국화폐를 사용하고 있다.

쇼팽을 그린 폴란드 지폐. 액면가는 5000 즈워티쉬(Zlotych). 1982년 발행. 폴란드 화폐는 1995년 만분의 일로 평가절하되었고, 이름은 즈워티(Zloty)로 바뀌었다. 위 지폐는 그 이듬해인 1996년까지 유통되었다. 현재 1 즈워티의 가치는 약 310원이다. 참고로 폴란드는 2004년 유럽연합에 가입했다. 하지만 유럽연합의 공식화폐, 유로(Euro)대신 자국화폐를 사용하고 있다.

 
얌전하고 예의 바른 쇼팽, 천사 같은 외모에 꿈결 같은 음악을 만든 그였지만 경제관념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그의 예를 보면 젊은 날 절약하고 저축하지 않으면 어려운 노후가 온다는 진리가 예나 지금이나 꼭 같이 통한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여기서는 쇼팽의 살림살이를 살펴보겠다.
 
음악가로서 쇼팽의 주 수입원은 연주회 수익금, 작곡한 악보의 출판료 그리고 피아노 레슨 수업료였다.
 
우선 연주회에 대해서 말하면, 쇼팽은 1841년 연인 조르주 상드의 도움으로 모처럼 연주회를 열어 6000프랑이 넘는 수입을 올렸다. (1프랑의 현재 가치는 약 1~2만원 정도로 추정된다) 상드는 이를 두고 여름 내내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빈둥 놀아도 되겠다며 주위에 자랑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큰 수입을 주는 연주회는 쇼팽의 일생을 두고 아주 드문 것이었다.
 
그는 대중 연주회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소심하여 많은 관중 앞에서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힘이 약한 그가 큰 홀에 맞는 음향을 생산해내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의 일생을 통해서 대중연주회는 고작 30회 안팎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 앞의 예만큼의 큰돈이 되지는 못했다 해도 - 상업적으로 수입을 좀 올렸던 연주회는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대중 연주회 대신 쇼팽은 귀족저택의 거실에서 수십 명의 초대 손님을 위한 살롱 연주회를 자주 가졌는데 살롱 연주회에서는 주최자가 제공하는 다과, 음식 정도가 연주에 대한 주된 대가였다.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경우에는 초청자는 약간의 수고료 혹은 선물을 주었다.
 
같은 시대에 최고의 인기 피아니스트, 리스트는 잘 나갈 때 일주일에 4~5회의 연주회와 한 해에 30만 프랑 정도의 연주회 수입을 올렸다. 또 한 명의 기교파 피아니스트 탈베르크는 파리 데뷔연주회 한 번에서만 1만 프랑의 수입을 올렸다. 이런 것을 고려하면 일류 피아니스트 쇼팽에게 연주회 수입은 보잘것없었다고 할 수 있다.
 
쇼팽을 새긴 폴란드 은화. 액면가는 50 즈워티쉬. 1972년 발행. 지금은 유통되지 않는다.

쇼팽을 새긴 폴란드 은화. 액면가는 50 즈워티쉬. 1972년 발행. 지금은 유통되지 않는다.

 
또 다른 수입원은 악보 출판료인데 그의 악보 출판료는 적은 편이 아니었다. 우선 급속히 보급된 피아노 수(數)에 뒷받침되어, 당시 악보의 수요층은 탄탄했다. 쇼팽의 악보는 특히 잘 팔렸다. 그의 곡은 소품 위주였고 소품은 대작에 비해 잘 팔린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그의 곡은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에게 인기가 있었다.
 
게다가 그의 연습곡과 전주곡은 고급과정의 피아노 학습에 필수 교재로 통했다. 쇼팽은 그 점을 활용하여 악보 출판료를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세상사에 휘말려 치고받고 하는 것을 피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출판사와 부딪쳐 얼마나 협상을 잘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리인인 친구를 통할 때는 깐깐하게 가격을 지키려 했다.
 
악보 출판료는 보통 한 곡당 300프랑 ~ 500프랑, 많은 것은 800프랑 이상도 받은 것 같다. (24개의 짧은 곡이 들어있는 작품번호 28번의 전주곡은 완성되기도 전에 2000프랑에 팔렸다) 그의 생전에 출판된 작품의 번호는 65번까지 이어졌다. (물론 한 번호 안에 여러 곡이 들어있는 경우도 많다)  그가 일생 받은 출판료는 많이 잡아도 전성기 리스트의 1~2년 치 연주회 수입에 못 미쳤을 것 같다.
 
뭐니 뭐니 해도 쇼팽의 주 수입원은 피아노 레슨이었다. 연주회를 자주 갖지 않았음에도 호사스러운 생활이 가능했던 것은 레슨 때문이었다. 레슨비로 그는 시간당 20프랑 정도를 받았는데 그 돈은 당시 일용직 노동자가 거의 한 달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으로 절대 적은 돈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 중에 한 사람으로서 그에게 단 한 번이라도 배웠다면 평생 이력서에 내 세울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것은 비싼 값도 아니었다.
 
그는 출판업자와 출판료에 대해서 깐깐하게 다투었던 것과 달리 레슨료에 대해서는 너무 점잖았다. 제자들이 대부분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의 부녀여서 더 받아도 문제가 없을 듯했지만 쇼팽은 레슨료 문제로 제자들과 왈가왈부하는 것을 꺼렸다. 학생들 앞에서 그는 항상 돈 문제에서는 대범해 보이려 노력하였다. 수업이 끝나면 학생은 레슨료를 벽난로 위의 선반에 올려두었고 그러는 동안 쇼팽은 짐짓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조르주 상드 기념 금화. '프랑스의 여성들' 시리즈 중 하나. 프랑스 조폐소(Monnaie de Paris) 주조. 2018.

조르주 상드 기념 금화. '프랑스의 여성들' 시리즈 중 하나. 프랑스 조폐소(Monnaie de Paris) 주조. 2018.

 
정해진 수업료 외에 더 돈을 주려 하면 정색을 하며 거절했다. 건강상의 문제로 학생의 수를 줄여야 했고 마차 비용도 부담스러울 때, 조르주 상드는 권했다. 방문 레슨의 경우 30프랑을 받고 마차 비용은 따로 청구하라고. 하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쇼팽은 보통 여름 몇 달은 작곡에만 매달렸고, 10~11월부터 이듬해 5월 정도까지 약 반년을 가르치는 데 전념했다. 쇼팽은 한창때 한 달에 2,700프랑, 한 해에 1만 4천 프랑쯤을 레슨으로 벌었다고 한다. 이는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당시 파리 음악원의 교수 연봉이 3,000프랑이었다고 한다.
 
이상의 수입을 모두 더 하여 쇼팽이 일생을 통해 번 돈을 개략적으로 따져보면 그가 번 돈은 절대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며 살 정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빚을 달고 살았다. 문제는 그의 씀씀이였다. 어릴 때 부유한 귀족 집안의 자제들 틈에서 자란 탓에 눈이 너무 높았다. 그는 돈을 쓸 때, 자신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았고 수입과 지출의 균형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쇼팽의 씀씀이는 유명했다. 파리에 와서 어느 정도 위상을 확보하자마자 바로 고급 주택가의 월세 높은 집으로 이사했고, 그 집을 고급 양단으로 천을 한 가구로 채운 그였다. 그러고는 다음 날부터 그 비용을 걱정하고 있었기에 리스트는 놀라워했었다. 그의 일상생활의 모든 것은 자신의 최고급 취향에 맞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마차에 많은 돈을 썼다. 마부도 그의 집 앞에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훌륭한 저택으로 레슨과 연주하러 다니는데 허름한 마차를 타고 다녀서는 체면이 안 선다고 했다. 필요에 따라 일반택시 혹은 고급 택시를 이용하면 될 것을, 최고급 외제 자가용차에 기사까지 두었던 셈이다.
 
그는 장갑에도 유난히 집착하였다고 하는데 장갑 하나쯤이 무슨 대수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고급 재질에 최신 유행의 장갑을 까다롭게 주문했기에 그 돈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또한 바지, 조끼, 재킷 하나하나를 모두 파리에서도 가장 유명한 가게에서 첨단 유행의 최고급 원단으로 특별히 주문해서 맞췄고, 상아로 만든 등긁개에, 향수, 비누 등도 모두 최고급제품만 사용했다. 작은 발에 구두는 항상 반짝반짝하게 닦고 다녔다는 그는 ‘즉흥적이고 변덕이 심한 소녀처럼’ 돈을 써댔다고 했다.
 
조르주 상드의 기념 금화의 뒷면. 악보를 배경으로 쇼팽과 상드가 새겨져 있다. '프랑스의 여성들' 시리즈 중 하나. 프랑스 조폐소 (Monnaie de Paris) 주조. 2018.

조르주 상드의 기념 금화의 뒷면. 악보를 배경으로 쇼팽과 상드가 새겨져 있다. '프랑스의 여성들' 시리즈 중 하나. 프랑스 조폐소 (Monnaie de Paris) 주조. 2018.

 
돈을 쓰는데 급급했던 쇼팽은 경제적으로는 항상 여유가 없었다. 파리의 폴란드 교포들은 레슨비도 많이 받고, 좋은 옷을 입고 다니면서, 고급 마차를 타고 상류 사교계를 드나드는 그가 돈이 없다고 하면 이해를 못 했다. 쇼팽은 파리에서 성공한 초기에도 바르샤바의 집에 보내는 편지에 ‘극빈자 쇼팽’이라고 자신을 칭했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쇼팽의 아버지는 교직에서 은퇴한 후에도 파리에 있는 젊은 아들에게 돈을 보내주어 그의 생활을 도왔다.
 
자신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 근근이 살면서 서울에서 외제 차를 타고 다니는 아들의 카드 값을 변제해준 격이다. 아들의 낭비벽을 잘 아는 그는 끊임없이 아들에게 어려울 때를 대비해서 저축하라고 권했다. 쇼팽에게 아버지 말은 쇠귀에 경 읽기였다. 쇼팽이 파리에서 명성을 얻고 자리를 확실히 잡았을 때 바르샤바의 어머니는 빚이 있는 가족의 상황을 전하며 도움을 요청했었다.  이때 분명치는 않지만, 쇼팽은 아마도 돈을 좀 보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그가 바르샤바의 가족들을 위해 배포 큰 지원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쇼팽이 그보다 훨씬 돈을 많이 번 상드와 같이 생활한 것은 그에게 행운이었다. 쇼팽이 번 돈은 쇼팽 자신의 ‘품위유지비’로 들어갔을 것이고 두 사람의 생활에서 공동의 비용은 상드의 지갑에서 지출되었을 것으로 필자는 추정해 본다.
 
당대 인기작가 상드의 소설은 대히트를 기록한 것이 많았고 그녀의 원고료는 음악 악보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았다. 상드는 상속받은 재산만도 50만 프랑에 이르렀고, 글을 써서 번 돈도 상당해서 쇼팽과 헤어지고 난 뒤인 1855년에는 한 해에 약 150만 프랑을 벌었다고 한다. 현 시세로 150억원이 넘는 큰돈이다.
 
쇼팽은 나중에 상드와 헤어지고 경제적 곤궁에 빠지게 된다. 아버지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미리미리 저축해두지 못했던 쇼팽은 만년에 형편이 급히 어려워졌고, 먹고 살기 위해 나쁜 건강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다. 병이 심해져서 레슨을 더는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쌓여가는 진료비와 먹고살 걱정에 잠도 잘 자지 못했다. 점잖게 벌어서 정신없이 지출한 그의 행태는 분명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격언의 정반대였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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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섭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필진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 한국인이 좋아하는 고전 음악가 쇼팽. 피아노 선율에 도시적 우수를 세련된 모습으로 담아낸 쇼팽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일생의 연인 상드와 다른 여러 주변 인물에 관련된 일화를 통해 낭만파시대의 여러 단면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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