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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어진 김정은의 입…남북 물밑접촉서 뭔 일 터졌나

중앙일보 2019.08.23 00:04 종합 24면 지면보기

꼬여가는 남북관계 해법 없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9월 무개차를 타고 평양 순안공항에서 백화원 초대소까지 카퍼레이드하고 있다. 최근 문 대통령을 겨냥한 북한의 대남비방이 거세지면서 남북 정상 사이에 무슨 속사정이 생긴 것 인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중앙포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9월 무개차를 타고 평양 순안공항에서 백화원 초대소까지 카퍼레이드하고 있다. 최근 문 대통령을 겨냥한 북한의 대남비방이 거세지면서 남북 정상 사이에 무슨 속사정이 생긴 것 인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중앙포토]

북한 김정은의 입이 거칠어졌다. 대남 비방은 물론 위협성 발언까지 육성으로 쏟아낸다. 문재인 대통령을 겨냥해 말폭탄을 터트리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미사일 발사나 신무기 체계의 도입 현장을 돌아본 뒤 이런 언급을 내놓고 이튿날 관영 선전매체로 퍼나르는 방식이다. 비난 어투도 점차 강해져 이미 위험수위를 넘었다는 관측이 북한 전문가 그룹은 물론 정부 당국자 사이에서 나온다.
 

4월 문 대통령 겨냥 ‘오지랖’ 포문
8·15 경축사 하루 뒤 미사일 몽니
“지난 봄 남북 빅딜 불발” 관측도
대응 전략 없어 사태 장기화 조짐

잇단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비난 행보에 남북 간 분위기는 썰렁해졌다. 지난해 2월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한 대남 특사 파견과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으로 후끈 달아올랐던 것과는 천양지차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드러나거나 알려진 사실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적지 않다. 김정은이 직접 문 대통령을 지목해 ‘망신주기’ 에 나서야 할 정도의 악재는 없었다는 점에서다. 무엇이 김정은의 몽니를 불렀을까.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북한의 비난 공세는 대북 문제를 상당 기간 다뤄온 관측통들의 고개까지 갸웃하게 만든다. 사사건건 걸고 들며 거친 비방을 퍼붓는 건 물론이고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표현을 동원한다는 점에서다. 깐깐한 북한 다루기로 대립했던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집권 당시 북한이 가한 비난 공세에 버금가는 수위다. 정상회담장에서 김정은이 직접 만나 교감했고, 북·미 관계가 꼬였을 때 가교역할을 해준 문 대통령에 대한 태도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지난달 25일 신형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를 지켜보며 주먹을 불끈 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조선중앙통신]

지난달 25일 신형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를 지켜보며 주먹을 불끈 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조선중앙통신]

지난 16일 북한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내놓은 담화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조평통은 전날 문 대통령이 8·15 경축사를 통해 ‘평화경제’와 통일비전을 밝힌 데 대해 “아랫사람들이 써준 것을 그대로 졸졸 내리읽는 남조선 당국자”라고 비난했다. ‘정말 보기 드문 뻔뻔한 사람’이라거나 ‘북쪽에서 사냥총 소리만 나도 똥줄을 갈기는 주제’ 등 막말도 동원했다. 이른바 ‘국가 기구’로 칭하는 조평통이 관영매체를 통해 내보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김정은의 문 대통령 몰아세우기는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8·15 경축사 이튿날 북한은 신형전술지대지 미사일 2발을 강원도 통천군 북방에서 동해 상으로 발사했다(사거리 230㎞). 지난달 25일 KN-23 미사일 2발을 시작으로 6번째 연쇄 도발을 벌였지만 8·15 경축사 하루 뒤 미사일 발사는 메시지가 분명했다.
 
문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최근 북한의 몇 차례 우려스러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대화 분위기가 흔들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 정부가 추진해온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큰 성과”라고 강조한 직후 보란 듯이 미사일을 쐈다는 점에서다. 김 위원장은 현장을 지켜본 뒤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고,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그 장면을 해외로 전송했다.
 
실타래처럼 꼬여버린 남북관계는 당분간 해법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북한이 대남 비방의 소재로 삼은 건 한·미 연합훈련과 F-35A 스텔스 전투기 도입이다. 연합훈련은 지난 20일 마무리됐고, F-35A는 2대가 21일 추가로 청주공항에 도착해 모두 6대로 늘었다. 북한이 대화 복귀 쪽으로 선회한다면 스텔스기 정도는 언제든지 없던 일로 할 수 있는 사안이다. 문제는 김정은이 전면에 나서 문 대통령을 향해 독설을 쏟아내고 있는 대목이다. 비방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이런저런 현안보다 문 대통령에 대한 김정은의 불신과 원망의 뿌리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김정은이 작심하고 문 대통령에게 포문을 연 건 지난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이다. 당시 김 위원장은 “남조선 당국은 추세를 보아가며 좌고우면하고 분주다사한 행각을 재촉하며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게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월 신년사에서 남북 정상회담 성과를 과시하면서 “참으로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거나 “대단히 만족스럽게 생각한다”고 평가하던 것과는 기류가 확 달라졌다.
 
물론 여기에는 2월 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난 좌절감이 반영됐을 수 있다. 하지만 김정은의 ‘변심’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6월 30일 판문점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난 김 위원장은 실무회담 재개 등 회담 궤도로의 복원에 합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문재인 때리기’는 멈추지 않고 파고가 높아지는 형국이다.
 
광복절 경축사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 [뉴스1]

광복절 경축사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 [뉴스1]

남북 간 ‘빅딜 불발설’이나 문재인-김정은 불화설이 제기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하노이 북·미 결렬 직후부터 김정은의 시정연설이 나온 시점 사이에 북측이 쉽게 풀기 어려운 이슈를 우리 측에 제기했고, 접점을 찾지 못하자 등을 돌렸다는 관측이다. 일각에서는 하노이 노딜 이후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를 관리하기 위한 남북 막후접촉이나 비공개 특사파견 과정에서 사단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북한이 구체적 요구를 내놓았을 공산도 크다는 얘기다. 김정은으로서는 지난해 3차례나 남북 정상회담에 응했고, 특히 9월 평양 정상회담의 경우 대규모 퍼레이드와 15만 군중을 동원한 문 대통령 연설 등 ‘통 큰’ 선물을 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북한 전문가는 “6·15 공동선언 당시 4억5000만 달러의 대북 비밀송금이나 10·4 선언의 대규모 인프라 지원 합의 같은 전례를 들어 모종의 상응 카드를 물밑 접촉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에 타진했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남북 모두 이런 관측을 뒷받침할만한 언급이나 분위기는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다만 평양 권력 내 기류를 반영해온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어제 내놓은 설명은 시사점을 준다. 조선신보는 김지영 편집국장이 쓴 기사에서 “지난해 9월 평양 공동선언이 채택된 이후부터 북측 당국의 신경을 건드리는 남조선 당국자의 실언, 망언이 터져 나왔다”고 지적했다. 특히 “(김정은) ‘연내 서울 답방’과 관련한 무책임한 발언도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청와대가 지난해 말 김정은 서울방문을 압박하는 모습을 보였고, 북한이 이에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결국 불발된 점을 지적한 것이다. 김정은의 최근의 대남 대립각 세우기가 대통령과 청와대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북한의 거친 공세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은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나가는 신중함이 필요하다”(8월 19일 수석·보좌관 회의)며 ‘역지사지’를 강조하고 있다. 북한에 우회적으로 남측의 입장을 이해해 달라는 주문이다. 하지만 김정은까지 나선 파상공세에 뾰족한 대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금도를 넘은 듯한 대통령 비방이 수그러들지 않는 걸 보면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나 서훈 국가정보원장의 대북 채널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는 분위기다.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에 따른 한·일 갈등 고조와 조국 서울대 교수의 법무장관 지명 사태 등으로 대북 이슈에 대한 정부 안팎의 집중력도 떨어진 상태다.
 
통일부와 외교·국방 등 대북 및 안보 부처의 대처가 미흡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연철 통일장관이 21일 남북 철도협력을 강조하며 언급한 남북관계에서의 ‘진정성’은 북한이 과거 보수정부와 대립각을 세울 때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온 단어다. 같은 날 정경두 국방장관이 국회 답변에서 북한을 ‘걔들’이란 표현하고, “맏형은 막내가 재롱을 부리고 앙탈 부린다고 같이 부딪쳐서 그러지 않는다”고 발언한 것도 마찬가지다. ‘맏형론’ 역시 북한이 강한 거부감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북한의 예봉을 꺾을 전략 부재와 참모들의 미숙한 북한 다루기가 겹치면서 문 대통령에 대한 평양발 비방공세는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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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이영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