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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옥의 한반도평화워치] 동아시아는 살얼음판, 칼날 품고 실력 길러야

중앙일보 2019.08.23 00:04 종합 27면 지면보기

격랑의 동아시아, 한국의 선택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1971년 7월 9일 미국 대통령 특사단은 사이공·방콕·뉴델리·라왈핀디를 거쳐 비밀리에 베이징에 도착해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만났다. 이듬해 2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도 중국을 방문해 상하이 코뮤니케를 발표했고, 1979년 미·중 수교를 계기로 중국은 본격적으로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미·중 갈등 동결한 ‘키신저 질서’
중국 부상, 동북아 판도 불안해져
한·일 협정 체제 민낯도 드러나
한국 외교의 새 제도 설계 절실

미·중 화해라는 역사적 계기를 만든 중심에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있었다.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적극 도왔고, 중국도 아·태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수용했다. 미·중은 상대의 가치와 신념을 존중하면서 냉전의 유산인 여러 갈등을 동결시키며 이른바 ‘키신저 질서’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2018년부터 시작된 미·중 무역 마찰은 키신저 질서가 해체됐다는 상징적 사건이다. 미국은 단극체제가 흔들리자 첨단과학기술의 상용화에 성공한 중국의 부상을 더는 용인하기 어려웠고 미·중 상호 의존을 무기화했다. 또 효용 극대화를 위해 구축했던 글로벌 가치 사슬 체계를 버렸고 세계무역기구(WTO) 등 다자 경제체제에 대한 불신도 팽배하다.
 
중국도 부상한 힘을 바탕으로 아·태 지역에서 미국의 존재감을 지우고자 했다. “아시아 안보는 아시아인이 지켜야 한다”며 ‘중국식 세계화’를 선택했다. 무역 마찰에서 시작된 양국의 갈등은 시간이 지나면 일단락될 것이다.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힘으로 막기 어렵고,중국을 힘들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미국의 경쟁력을 강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중은 안보와 산업에 대한 상호 의존을 줄이면서 기술패권경쟁이라는 장기전에 돌입했다.
  
미국 리더십 한계 파고든 아베
 
미·중 무역 분쟁에서 보인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과 행동은 일본 아베 신조 총리를 전염시켰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서방 국가에서 이탈해 기술 경제제재를 동원해 자신의 정치적 요구를 수용하도록 우방국 한국을 압박했다. 물론 역사와 영토 분쟁 그리고 동맹국 간 갈등을 조정하지 못하는 미국 리더십의 한계를 파고든 측면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일 갈등은 우리를 매우 곤란한 입장에 놓이게 했다. 양국이 잘 지내야 한다”고 말해 뾰족한 해법이 없다는 것을 실토했다.
 
여기에는 한·미 관계에 대한 이간계를 가지고 미국의 조야를 적극적으로 설득해 온 일본의 움직임도 한몫했다. 일본은 이미 칼을 빼 들었기 때문에 미국을 묶어두고 한국을 한·미·일 안보 협력 바깥으로 밀어내는 외교적 시위를 지속하고, 중·일 관계 개선을 통해 역내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할 것이다.
 
한·일 갈등은 미국과 무역 전쟁을 하는 중국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중국 학계는 이를 다양하게 해석한다. 첫째, 일본은 한국에 대한 경제 보복을 통해 역사와 영토 문제의 도미노 효과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했다. 둘째, 핵심 산업 분야에서 보완성보다 경쟁성이 높아진 한국의 추격 속도를 늦추고자 했다. 셋째, 한·일 국력 격차가 3분의 1로 줄면서 동아시아에서 양국 관계의 지위가 변화하고 있는 것을 우려했다. 넷째,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논의 과정에서 일본 패싱에 대한 반발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 차원에서는 비교적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는 등 미·중 무역 마찰이 확대되는 상황을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또 한·중·일 자유무역 지대와 중국이 야심 차게 추진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의 연내 처리를 어렵게 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중국 외교부는 “상호 존중, 평등한 대우, 호혜 공영의 기초에서 대화와 협상을 통해 관련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란다”는 중립적 입장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내년 봄으로 예정된 시진핑 주석의 일본 방문과 새로운 중·일 관계 설정 논의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중국은 북핵 문제의 정책 공조를 위해 여전히 한·중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이 있다. 시진핑 주석의 한국 방문과 문재인 대통령의 내년 중국 재방문도 살아있는 카드다. 청와대 비서실장도 이를 의식해 미국의 신형 정밀유도미사일 배치 계획에 대해 “정부는 논의한 적도 검토한 적도 없으며, 앞으로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미국의 동아시아 영향력 축소하려는 중국
 
1972년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 주석(오른쪽)과 대화하는 헨리 키신저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가운데는 저우언라이 총리. [중앙포토]

1972년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 주석(오른쪽)과 대화하는 헨리 키신저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가운데는 저우언라이 총리. [중앙포토]

중국은 한·일 갈등을 미국의 역내 리더십 변화라는 구조적 맥락에서 접근한다. 즉 공정과 공평 맥락에서는 한국을 지지해야 하지만, 일본의 지정학적 가치가 높은 상황에서 ‘관여할 뿐 중재하지 못한다’는 미국의 딜레마에 주목하고 중국에 미치는 대차대조표를 작성하고 있다. 우선 한·일의 상호 불신 때문에 한·미·일 삼각관계가 동력을 잃게 되면서 중국의 전략 구도에는 불리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기반해 중국은 미국을 원정군(遠征軍)으로 만들어 아·태 지역에서 전략적 지위를 약화시키고자 할 것이다.
 
이미 중국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의 한국 배치 등 미국의 전략자원 배치에 강력하게 반발한 바 있다. 최근에는 주한미군 주둔 방식과 한미동맹을 문제 삼고 있다. 미국이 중거리핵전력협정(INF)에서 탈퇴하면서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부 장관이 지상 발사형 중거리미사일의 동아시아 배치를 원한다고 밝히자, 중국이 “한·일은 미국의 총알받이 되지 말라”고 거칠게 논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동안 키신저 질서는 미·중 관계를 안정화하고 지역 갈등을 동결하는 데는 기여했으나, 아·태 지역에 잠복해 있던 역사와 영토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약화하면서 상품·서비스·기술의 자유로운 이동은 막히고 있고, 그 자리에 불확실성과 불안정성, 상호 불신이 자리 잡으면서 동북아는 살얼음판으로 변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오직 정치적 정체성과 핵심 가치를 지키는 미국 우선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정치적 매몰 비용이 적은 중국은 기술 입국을 위한 장기 전략을 짜고 있다. 중국의 대표 통신기업 화웨이는 지난주 홍멍(鴻夢)이라는 운영체제(OS)를 출시하면서 기술 자주화 실험에 나섰다. 일본도 민주주의와 평화 궤도를 이탈하면서 전범 국가의 멍에를 벗고, 자위대를 헌법에 명문화하여 역내 군사적 존재감을 확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한국은 공동·다자 안보 기획해야
 
한국은 정책 선택의 어려움이 높아지고 무거운 과제를 안게 됐다. 첫째, 미·중 무역 마찰과 한·일 갈등은 전통적인 무역과 통상이 무기화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점에서 담론과 정책의 시간 차이를 줄이고 한국 외교의 새로운 제도 설계가 필요해졌다. 둘째, 한·미·일 반공 연대와 불충분한 과거 청산이라는 두 축으로 형성된 ‘1965년 체제’는 한반도 비핵프로세스와 자발적 시민의식과 충돌하고 있다. 한·일 가치사슬체계의 민낯이 드러나는 등 한·일 관계 존재 방식에 대한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한국의 대일 정책 선택이 향후 한·중, 한·미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이를 외교적 자산으로 축적할 수 있다. 그래야 한국이 일본에만 강경하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셋째, 글로벌 가치사슬체계가 무너진 상황에서 기존의 선택과 집중 전략에서 벗어나 부품과 소재 자주화를 향한 정책을 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기술적 시장 지배력을 가지지 못한 산업과 기업을 지원하고 퇴출 압력이 높아진 산업과 기업에 대해서는 효율적 재배치와 적극적 사회안전망을 연계하는 복합·장기 처방이 중요하다.
 
넷째, 한국형 가치사슬체계 완성이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다자체제를 복원하는 한국 이니셔티브는 여전히 중요하다. 다만 자유무역지대 협상 전략에서 서비스·금융 시장의 개방 폭을 확대하는 것을 넘어 부가가치가 높은 공정 중심의 가치사슬체계에 진입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어제 파기라는 위기를 맞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호르무즈 해협 호위 연합체 참여,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문제를 같은 테이블에 올려놓고 복합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안보 의존이 높아질수록 한국 외교의 공간이 줄어들 수 있다는 점에서 공동 안보와 다자 안보를 적극적으로 기획하면서 일국 편승외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한반도 전체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을 수 있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고, 일본의 역할 공간도 만들어 줄 수 있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요구를 김정일 위원장에게 전달한 경험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칼집에 날카로운 칼날을 감추고 보름달을 생각하며 그믐달을 품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의미를 새길 필요가 있다.
 
이희옥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성균중국연구소장·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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