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소문 포럼] 프라하에서 온 백태웅 하와이대 교수의 이메일

중앙일보 2019.08.20 00:21 종합 30면 지면보기
강민석 정치에디터

강민석 정치에디터

백태웅(56) 하와이대 로스쿨 교수는 체코 프라하에 머물고 있었다. 아마도 유엔 인권이사회 일(그는 2015년부터 강제실종그룹 위원으로 활동) 때문 아닐까 싶다. 백 교수는 서울대 법대 졸업 후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1989년 ‘사노맹’(사회주의 노동자동맹)을 결성한 인물이다. 26세일 때였다. 요즘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검증과정에서 야당이 “국가전복을 꿈꿨다”고 지목한, 바로 그 조직이다.
 
조 후보자가 일원으로 참여한 정도라면, 백 교수는 정점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 대학에서 인권법을 가르치는 교수로 있다. 뿐만 아니라 유엔에서 활동하는 국제적 전문가다. ‘변신’이 아니라 삶 자체가 변했다고 할 수 있다. 그와 최근 두 차례 e메일 인터뷰를 했다. 연락처는 백 교수와 친구 사이인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구했다.
 
한국에서 사노맹 논란이 불거진 것을 아는지.
“조국 교수가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일한 것도 몇 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뒤늦게 과거의 색깔론을 동원하여 논란을 일으키고 공방을 주고받는 한국 정치 현실을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오늘 이 시점에서 또다시 독재정권 시절 안기부 밀실에서 진행되던 고문이나 박종철의 죽음 같은 것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는 것이 너무 아이러니로 느껴진다.”
 
‘국가 전복’을 꿈꿨다는데.
“지난 운동권은 공안기관이 주장하는 것 같이 이념에 사로잡힌 기괴한 인간들이라기보다는 불의에 대해 비타협적으로 저항하고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동시대의 소외당하는 세력들의 편에 서려는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안기부가 증거도 없이 극우적이고 냉전적인 공안논리를 동원하여 전 국민을 대상으로 소위 사노맹 수사 결과라고 발표한 섬뜩한 용어들을 상황에 대한 아무런 부연설명이나 사실에 기반한 진실 확인의 과정도 없이 반대 세력을 비난하는 정치적 논리로 사용하는 것에 절망감을 느낀다. 지난 시대의 불의에 맞서고, 정의롭고 평등이 보장되는 사회를 열망하던 한 세대의 활동을 특정한 이념으로 치환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최근 한국에서 친구들을 만난 백태웅 교수(오른쪽). 왼쪽은 송영길 의원 부부. 부인 남영신씨도 이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다. 백 교수 옆은 이정우 변호사. 84년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사시·행시·외시에 합격했다. [사진 송영길 의원]

최근 한국에서 친구들을 만난 백태웅 교수(오른쪽). 왼쪽은 송영길 의원 부부. 부인 남영신씨도 이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다. 백 교수 옆은 이정우 변호사. 84년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사시·행시·외시에 합격했다. [사진 송영길 의원]

사회주의를 전면에 걸긴 했다.
“그때 논의된 사회주의는 당시 안기부나 공안기관의 주장처럼 마르크스 레닌주의나 주체사상을 그대로 적용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 사회의 불의를 넘어설 완벽한 대안 사회의 전망까지 갖춘 완성된 정치이념도 아니었다. 자유와 민주주의, 평등과 경제적 민주주의, 노동자를 비롯한 소외받는 사람들이 사회의 주역으로 복원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해외에서 한국 정치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제가 ‘유엔인권이사회 강제실종 실무그룹’ 위원이자 부의장으로 세계 각국에서 현재 벌어지는 인권침해의 실상을 매일 대하고 있지만, 한국에서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와 정의를 추구한 노력을 낡은 공안의 잣대로 재단하는 논리는 이제 시대에도 맞지 않고, 또 그동안 눈부시게 발전해온 한국의 인권 수준에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아무쪼록 청문회 과정에서 합리적 논의와 지난 시기에 대한 차분한 성찰 속에서 우리 사회가 과거 지향적 논리를 벗어나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기회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사실 사노맹은 유신 말기→5·17 신군부 세력(JP의 말에 따르면 ‘5·16의 고약한 동생’)의 등장→5·18 광주의 비극→전두환 정부의 공안통치로 이어진 정치환경을 무시하고선 생각할 수 없다. 당시 시대 흐름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꾸던 많은 이들이 공안논리로 처벌받았다. 헌법이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이상 우리는 적어도 꿈을 꿀 자유는 있어야 하는데도. 설령 그것이 몽상일지라도 말이다.
 
조만간 조국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열릴 것이다. 공직 후보자가 연루된 과거 사건은 물론 검증 대상이다. 하지만 야당도 접근을 차분하게 했으면 한다. 당시 군사정부 시절 꾸었던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을, 비현실적이었고 통찰이 부족했다고 지적할 순 있어도,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국가 전복의 꿈’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젊었을 때 공산주의자가 아니어도 바보이고, 나이 들어 공산주의를 하면 더 바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사람이 칼 포퍼다. 아마 칼 포퍼가 ‘당시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젊었을 때 이미 구속이 되어버려, 저런 말을 남기지도 못했을 것이다.
 
강민석 정치에디터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