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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 만세" 모바일 퀼트로 뭉친 멋진 랜선 언니들

중앙일보 2019.08.19 13:00

[더,오래] 홍미옥의 폰으로 그린 세상(33) 

 

'인생은 한장의 커다란 퀼트와 같아! 한 땀 한 땀 조각을 잇다 보면 마침내 완성된 큰 무늬가 나타나는 거야, 결국 삶은 하나의 커다란 무늬인 거지.'

 
영화 아메리칸 퀼트에 나오는 대사다. 영화에선 초로의 여인네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담아 바느질을 한다. 거대한 태풍이 불어대고 좌절과 희망이 교차하던 순간에도 그네들의 바느질은 삶을 이어가듯 계속됐다. 마침내 한장의 조각이불이 완성되고 거기엔 그네들의 인생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우리의 삶도 그처럼 이런저런 일들이 겹치고 지나가고 이어져서 이루어지겠지 싶다.


랜선으로 만난 언니, 동생들이 함께 이어가는 세상은?

우리들만의 8.15 프로젝트를 위해 함께 뜻을 모아 기미독립선언서를 그리고 필사했다. 갤럭시탭 s3, 아트레이지 사용[그림 홍미옥]

우리들만의 8.15 프로젝트를 위해 함께 뜻을 모아 기미독립선언서를 그리고 필사했다. 갤럭시탭 s3, 아트레이지 사용[그림 홍미옥]


언젠가부터 랜선 이모, 랜선 언니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 등 SNS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다. 당연히 내게도 랜선 동생, 언니들이 있다. 이젠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도 그 만남을 이어가는 중이다. 서로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터라 모임은 활기를 띠게 마련이다. 모바일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40대 후반부터 60대까지 연령층도 다양하다.
 
그중엔 이미 며느리를 둘씩이나 본 회원도 있고 아직 어린 초등학생의 엄마도 있다. 스터디룸을 빌려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그림을 그리다 보면 갈래머리 여고생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들곤 한다. 우리 랜선 언니, 동생들이 이 무더운 여름에 영화 '아메리칸 퀼트'의 주인공들처럼 이런저런 사연을 잇고 덧대어서 만들어낸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 통의 이메일이 가져다준 우리들의 이야기

 
어느 날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독립운동백주년기념 인증사업에 참여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사업이니 인증이니 참여마당 등 내겐 낯선 단어였기에 무심코 지나쳤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저런 일에 끼어든단 말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자꾸만 머릿속에 '우리도?' 하는 생각이 수시로 들기 시작했다. 혼자였다면 엄두도 못 냈을 용기가 슬그머니 끼어든 것이다. '모바일그림 모임이니 뭔가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모르겠다, 그냥 저질러 버릴까?'

 
폰이나 태블릿 위에 독립운동과 관련된 그림을 그리거나 기존 이미지를 변형하고 그 위에 모바일 손글씨 필사를 했다. [그림필사 홍미옥. 김현정. 장희선. 최계현. 이희숙. 권의단]

폰이나 태블릿 위에 독립운동과 관련된 그림을 그리거나 기존 이미지를 변형하고 그 위에 모바일 손글씨 필사를 했다. [그림필사 홍미옥. 김현정. 장희선. 최계현. 이희숙. 권의단]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시작됐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독립운동과 관련된 그림을 그리거나 기존의 이미지를 살짝 변형해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릴레이 형식으로 필사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시작해보니 종이도 아니고 미끄러운 폰이나 태블릿 위에 글씨를 쓰는 일은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었다. 다들 중년의 나이인지라 돋보기를 쓰고 필사하는 모습은 때론 안쓰럽고 때론 귀엽게(?) 진지했다. 침침한 눈을 비벼가며 서로 배우고 가르쳤던 2019년 우리 중년의 여름은 뜨거웠다.

 
기미독립선언서를 총 19개 문단으로 나누어 릴레이 형식으로 그리고 필사하였다. [그림필사 최희은. 김민우, 이서현, 강윤행, 류승희, 김윤희]

기미독립선언서를 총 19개 문단으로 나누어 릴레이 형식으로 그리고 필사하였다. [그림필사 최희은. 김민우, 이서현, 강윤행, 류승희, 김윤희]

 
놀라운 건 가족들의 반응이었다. 나뿐 아니라 회원들의 가족들은 한마음으로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갱년기의 짜증만 남았던 엄마가 아내가 혹은 남편이 새로운 뭔가에 몰두하는 게 좋았던 모양이다. 총 19조각으로 나뉜 선언서를 각자 열심히 쓰고 그렸다. 마침내 완성작이 나왔을 때 우린 사뭇 감격해 마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영화 속 퀼트이불처럼 정해진 패턴도 규칙도 없이 그저 마음을 다해 그리고 써 내려 간 우리의 이야기가 하나의 완성품으로 펼쳐진 것이다.


필사에 사용된 그림은 창작품도 있고 기존의 이미지 위에 덧대는 포토드로잉기법을 사용해서 그렸다. [그림필사 양은심, 구은주, 장희선, 노원희, 송주연, 이희숙, 이신애]

필사에 사용된 그림은 창작품도 있고 기존의 이미지 위에 덧대는 포토드로잉기법을 사용해서 그렸다. [그림필사 양은심, 구은주, 장희선, 노원희, 송주연, 이희숙, 이신애]

 

빈 둥지 증후군, 갱년기 우울증도 함께하니 사라지더라

 
아무래도 여럿이 함께하다 보면 사연도 많은 법! 회원 중에는 애국지사 정암(精庵) 이태현(李太鉉) 선생의 친손녀가 직접 할아버지를 그려서 우릴 뭉클하게 했다. 또 유관순 열사의 몇십년 고교후배가 선배를 정성껏 그리기도 했다.

 
큰 수술 후 그림으로 치유하는 이, 가족을 떠나보낸 슬픔을 그림에 담아낸 이, 일본에서 직접 날아와 기꺼이 참여한 이, 바늘 대신 모바일 펜을 들고 씨름하던 규방 공예작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쁘다는 수험생 엄마, 심한 열병을 앓으면서도 안중근 의사를 그려낸 이 등 많은 사연이 이 여름을 함께 했다.
 
덕분에 하마터면 친구 하자며 다가올 뻔했던 빈 둥지 증후군, 갱년기 우울증은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우리 랜선패밀리! 뜨거운 여름을 열정적으로 보냈으니 다가오는 매서운 겨울 칼바람도 함께 맞서봐야겠다.

 
8.15프로젝트 '모바일로 기억하는 독립운동백주년'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사진.김민우]

8.15프로젝트 '모바일로 기억하는 독립운동백주년'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사진.김민우]

 
홍미옥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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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미옥 홍미옥 스마트폰 그림작가 필진

[홍미옥의 폰으로 그린 세상] 둘도 없는 친구인 스마트폰과 함께 세상 이야기를 그리는 중년 주부.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중년도 아직 늦지 않았음을 그림을 통해 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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