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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글느글한 삶의 기름때를 씻는다, 낯선 곳서 한 달 살기

중앙일보 2019.08.19 11:00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43)

 아이들 없이 부부만 같이 있으면 어색하고 힘들다는 사람도 많지만 나의 해외 한 달 살기는 '부부가 함께' 가는 것이 전제다.[사진 Pixabay]

아이들 없이 부부만 같이 있으면 어색하고 힘들다는 사람도 많지만 나의 해외 한 달 살기는 '부부가 함께' 가는 것이 전제다.[사진 Pixabay]

 
드디어 떨리는 손으로 항공권을 결제했다. 취소환불도 쉽지 않은 최저가 티켓이라 이제 빼도 박도 못하고 “레츠 고!”다.
 
퇴직 후 일 년에 한 달씩 해외에서 지낸다. 요즘 신혼 또는 어린 자녀가 있는 부부들이 제주도나 동남아 같은 곳에서 한 달씩 살며 힐링하고 추억 쌓는 게 유행이다. 나도 진작부터 하고 싶었지만 직장생활을 끝마치고 아이들 다 키운 후에야 시작할 수 있었다.
 
일본과의 경제전쟁으로 시국이 어수선하고 환율도 급등해서 부담스럽지만 ‘나만의 콘텐트 만들기’ 역시 은퇴 후 2단계 인생 설계의 중요한 부분이니 중단할 수 없다. 작년에 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에 다녀온 후 ‘한 달 살기’에 대한 강연 요청이 자주 들어왔다. 이미 인터넷에 많은 내용이 있지만 중요한 건 ‘눈높이’였다.
 
우리 부부가 유명한 곳보다는 덜 알려진 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속된 말로 그냥 편하게 '짱박히고' 싶어서다. 그러니 어쩌면 해외 한 달 살기는 여행보다는 부부생활의 일환이다. [사진 박헌정]

우리 부부가 유명한 곳보다는 덜 알려진 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속된 말로 그냥 편하게 '짱박히고' 싶어서다. 그러니 어쩌면 해외 한 달 살기는 여행보다는 부부생활의 일환이다. [사진 박헌정]

 
나의 ‘해외 한 달 살기’에는 앞에 '은퇴부부의'가 붙는다. <은퇴부부의 해외 한 달 살기>다. 열심히 일했지만 자유여행에는 낯선, 나이로 치면 5060이고 베이비 부머인,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80년대 말에는 한창 일하느라 여유 없던 세대, 영어를 제대로 배울 수도 없었고 긴 휴가를 쓸 수도 없었던 세대다.
 
그 세대의 눈높이에 맞는 ‘해외 자유여행’ 이야기는 드물다. 아직은 왕성한 은퇴세대, 부부가 순전히 둘만의 힘으로 낯선 곳에서 살아보는 경험에 대한 설렘과 호기심은 당연하다. 그런데 시중에 나온 여행책자들은 품격과 여유 대신 실용과 도전으로 채워진, 젊은 층 대상의 배낭여행 안내서다. 땀 흘리며 한 곳이라도 더 찾아다니기 위한 정보뿐이지 점잖게 차려입고 현지인들 틈에서 잔잔하게 지내는 생활은 아니다.
 
나로서는 정형화된 플랫폼이 아니라 그때그때 조사하고 시행착오 겪으며 하는 일인 만큼 최대한 솔직하고 담백하게 같은 세대의 입장에서 경험을 나누려 한다. 그래서 나의 실제 여행과정이나 강연내용에는 빠릿빠릿함 대신 중년의 어설픔을 전제로 하여 아주 많은 ‘여백’을 둔다.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떤가? 굳이 유명관광지 아니어도 현지인 실컷 보고, 그쪽 공기, 물, 식료품, 커피, TV 등에 온몸을 실컷 노출하며 빈둥대면 그게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다.
 
동유럽은 아직 여행 정보도 많지 않고, 민족과 종교 등이 복잡하게 얽혀 조심스럽지만 서유럽 부자나라들에 비해 사람들이 정 많고 친절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사진 박헌정]

동유럽은 아직 여행 정보도 많지 않고, 민족과 종교 등이 복잡하게 얽혀 조심스럽지만 서유럽 부자나라들에 비해 사람들이 정 많고 친절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사진 박헌정]

 
중요한 것은 꼭 ‘부부가 함께’ 하는 것이다. 은퇴 후에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배우자이니 낯선 곳에서 한 달 생활이라는 긴장되고 중요한 일을 배우자와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평생 같은 패턴으로 살아왔으니 한쪽이 결핍을 느끼거나 필요한 부분은 배우자에게도 똑같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남자가 바빠서 여행을 다니기 힘들었으면 여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가끔 “배우자와 함께 가고 싶어도 가면 100% 싸울 텐데 어떡하냐?”는 질문을 받는다. 아이들 없이 부부만 같이 있으면 어색하고 힘들다는 사람도 많다. 여행보다는 부부클리닉 주제 같은데, 일단 급하게 마음 먹지 말고 점진적 강화를 해나가야 할 것 같다. 당장 저녁에 카페나 공원 산책부터, 동해안 당일 나들이, 2박3일 제주도… 하여튼 나의 전제는 부부가 꼭 함께 가는 것이다.
 
왜 꼭 ‘한 달’이냐는 질문도 받는다. 물론 현실적인 여건상 한 달을 넘기기도 힘들지만, 무엇보다도 한 달은 여행으로는 최대기간이고 생활로는 최소기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상 편한 팔자라 하더라도 그 이상 있으려면 뭔가 책임과 의무가 따를 것 같지 않은가. 일하든 뭘 배워 오든….
 
우리는 9월에 출발한다. 올해도 동유럽이고, 헝가리에서 시작해서 발칸반도 안쪽의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불가리아 소피아로 아주 느리게 조금씩 이동한다. 지인들은 “왜 맨날 구석(대체 어디가 구석일까)으로만 다니냐?”고 묻는다. 우리는 유명한 곳보다는 덜 알려진 낯선 곳에서의 다소 새콤한 긴장감을 좋아한다. 여행의 감정을 내밀하게 간직하고 싶어, 속된 말로 어딘가에 그냥 편하게 ‘짱박히고’ 싶어서다. 그걸 보면 한 달 살기는 여행보다는 부부생활의 일환 같다.
 
여백을 많이 두는 여행이 좋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어떤가? 유명한 곳이 아니어도 그쪽 공기, 물, 식료품, 커피, TV 등에 온몸을 실컷 노출시키며 빈둥대는 게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다. [사진 박헌정]

여백을 많이 두는 여행이 좋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어떤가? 유명한 곳이 아니어도 그쪽 공기, 물, 식료품, 커피, TV 등에 온몸을 실컷 노출시키며 빈둥대는 게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다. [사진 박헌정]

 
동유럽 여행은 물가가 저렴한 것 빼곤 많이 불편하다. 국내에 관광 루트로 소개된 곳 아니면 여행정보도 거의 없고, 민족과 종교 등이 복잡하게 얽혀 조심스럽고, 키릴문자 쓰는 곳에서는 문맹이 될 수밖에 없다. 그저 현지인들의 호의와 스마트폰의 영민함만 믿고 떠날 뿐이다.
 
‘해외 한 달 살기’에 대한 중장년층의 관심은 경제적인 부분도 중요하다. 작년에는 두 명의 한 달 예산이 800만원이었는데 실제 640만원 들었다. 아마 부부가 여행사 패키지상품으로 열흘 정도 다녀오는 것과 비슷할 것 같다. 올해도 저렴한 항공권에, 아파트 빌려 현지에서 장 봐서 밥해 먹고, 동네 카페에 나가 커피 한 잔에 햇볕은 무한리필 하는 생활을 하면 작년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어떻든 경제적 충격이 있어선 안 된다. 우리는 동유럽의 저렴한 물가 덕분에 한국에서의 한 달 생활비에 비행기값 정도 더 드는 걸 기준으로 예산을 책정한다.
 
이제 현지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올해는 키릴문자 읽는 법을 익히려 한다), 창고에서 여행용품 꺼내고, 마트에서 한국음식 장을 보면 출발이다. 말은 쉽지만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긴장과 두려움이 존재한다. 그래도 한 달간의 낯선 곳 생활에서 초강력의 산(酸)이 나와 느글느글해진 삶의 기름때를 씻어줄 것 같다.
 
박헌정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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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정 박헌정 수필가 필진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 25년간의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50세에 명퇴금 챙겨 조기 은퇴해서 책 읽고, 글 쓰고, 여행하는 건달이자 선비의 삶을 현실화했다. 은퇴 후 도시에 뿌리 박혀버린 중년의 반복적이고 무기력한 삶에 저항하기로 했다. 20대는 돈이 없어 못하고, 30-40대는 시간이 없어 못하고, 60대는 힘과 정보가 없어 못하던 일들, 꿈만 같지만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야 할 일들, 50대의 전성기인 그가 그 실험에 도전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인생 환승을 앞둔 선후배들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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