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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민 퍼스펙티브] 일본의 유례없는 수출 규제, 이제 멈춰야 한·일 미래 살린다

중앙일보 2019.08.19 00:03 종합 26면 지면보기

국가 안보와 한·일 갈등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국가 안보 조항은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다. 거의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여기 처음 깃발을 꽂은 건 미국 트럼프 대통령. 2018년 철강 관세에 이어 지금 자동차에 같은 조치를 만지작거린다. 모두 국가 안보에 근거한다.
 

국가안보 이유 전방위 교역 제한
일본의 원래 입장과도 어긋나
한·일, 서로 카드를 보았으니
타협 방안 모색 나서야 할 시점

이 문제가 일본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할 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판도라 상자를 연 미국도 조심스레 다룬다. 철강이면 철강, 자동차면 자동차다. 품목별·사안별로 1년에 걸친 조사로 수백 페이지 보고서를 낸다. ‘신뢰 저하’ 한 마디로 이를 전 산업 영역으로 확장할 준비를 한 건 일본이 처음이다. 관세·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출범한 1947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트럼프판 ‘국가 안보 1.0’을 ‘국가 안보 2.0’으로 업그레이드하였다. 단순히 무슨 리스트에 넣고 빼고의 문제가 아니다. 교역 질서의 근본을 흔들었다. 일본이 너무 세게 나갔다.
 
국가 안보는 GATT 21조에 나온다. 전쟁·긴급사태, 핵물질 교역, 군수물자 확보, 유엔 결의 이행을 위한 조치에 GATT 적용을 면제한다. 이 네 가지만 해당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무주공산에 주춧돌이 놓였다. 지난 4월 5일 우크라이나·러시아 분쟁(크림반도 분쟁)에서 세계무역기구 (WTO) 패널 판정은 이 조항을 최초로 다루었다. 앞으로 국가 안보 사건의 준거점이 될 것이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우리를 비롯한 17개국이 3자 참여를 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GATT 체제 72년 유례없는 초강수
 
2017년 11월 법률 서면에서 일본은 이런 입장을 밝힌다. 21조는 중요 국익을 보호하는 특별한 조항으로 국가의 재량을 인정해야 하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으며 극도로 신중히 행사되어야 한다”(not unbounded and must be exercised with extreme caution)는 것이다. “극도로 신중히”가 눈에 띈다. 이런 서면에 잘 쓰지 않는 용어다. 요컨대 일본 입장에 따르더라도 안보를 이유로 한 교역 제한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 확인과 논거 제시가 함께 와야 한다.
 
이 잣대로 일본의 수출 규제로 시작된 지난 50일간의 통상 분쟁을 보자. 구체적인 설명, 거의 없었다. ‘신뢰 저하’만이 반복되었다. 21조 네 항목과 동떨어진 내용이며 일본 스스로 밝힌 기준과도 아귀가 맞지 않는다.
 
지금 상황은 그 이름을 어떻게 붙이더라도 수출 제한이라는 본질을 바꿀 수 없다. 사과를 아무리 배라 부른다 하여 배가 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물길 차단이 협정 위반이라면, 수도꼭지를 틀었다 잠갔다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불확실성 측면에선 오히려 해악이 더 크다.
 
이 유례없는 조치를 일본이 어떻게든 되돌리거나 최소한 멈추지 않는다면 한국의 선택지도 제한적이다. 논란이 분분하나 WTO 행은 불가피해 보인다. 일본 역시 여러 명목의 맞제소로 나올 것이다.  
 
물론 통상 분쟁이 한·일 갈등을 해결 못 한다. 그 본질은 외교 분쟁이다. 거기 얽힌 법률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해석이다. 그러나 그 갈등의 씨앗이 지금 초강수 수출 제한 조치로 발아한 이상 한국 입장에선 싫든 좋든 WTO 틀에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한국 맞대응 불가피, 상호 제소 이어질 듯
 
여기 걸리는 시간이 문제다. 대략 27개월 걸린다. 다른 국제 재판은 어떤가? 국제사법재판소(ICJ) 절차는 평균 4년, 중재재판은 평균 2.5년이다. 국내 재판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기본적으로 걸리는 시간이 있다. 불가피하다. 항소 절차 마비 가능성도 문제다. 그러나 1심 패널 판정의 중요성을 봐야 있다. 주춧돌을 놓은 크림반도 분쟁도 패널 판정이다. 지금 일본이 주춤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으나 통상협정 위반 문제를 강하게 국제사회에 제시한 것도 일조하였다.
 
외교 문제를 법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법적인 절차로 물길을 막는데 넋 놓고 두고 보는 것도 잘못된 일이다. 때론 대응이 불가피하다. 그러니 더 격화되기 전에 이쯤에서 수출 제한 조치를 일단 멈춰야 한국도 타협에 나설 명분이 생긴다.
 
좀 더 깊이 보자. 주목할 부분이 있다. 국가 안보 분쟁의 독특한 행로다. 외교 갈등-통상 분쟁-ICJ 분쟁의 3단계 패턴이다.
 
다시 크림반도. 지난 4월 5일 판정 사건 외에도 우크라이나·러시아 간 맞제소로 WTO에 3건이 더 걸려 있다. 철로 차단, 상품 차별, 인증 요건 강화 등 사유도 다양하다. 이 3건도 밑바닥은 동일하다. 크림반도 분쟁, 그리고 국가 안보다.
  
일단 확전의 불 꺼야
 
이번엔 중동으로 가 보자. 사우디아라비아 중심의 7개국과 카타르(이란)가 맞서고 있다. 여기서도 외교 갈등이 통상 분쟁으로 이어졌다. 사우디·카타르·UAE(아랍에미리트)·바레인이 서로 제소한 5건이 지금 WTO에 걸려 있다. 모두 국가 안보가 핵심 사안이다. 머지않아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는 판정이 나올 전망이다.
 
그런데 이들 국가 안보 분쟁은 지금 ICJ에도 걸려 있다. 이상하다. 언제든 제소 가능한 통상 분쟁과 달리 ICJ 분쟁은 당사국 동의가 필요한데 어찌 된 일인가? 희한하게도 이 분쟁들은 모두 인종차별철폐협약의 길을 타고 ICJ로 이어졌다. 181개국이 가입한 이 협약은 ‘국적(National Origin)’에 따른 차별도 포함한다(1조). 그리고 이 협약상 분쟁은 항상 ICJ로 간다(22조). 협약 가입 순간 ICJ행에 동의한 것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와 위의 중동 9개국 모두 가입국이다.
 
지금 크림반도와 중동 분쟁에선 국적에 따른 차별이 여럿 제기된다. 외교 관계 악화로 자국 내 타국민들의 출입국·재산권·송금·교육·문화활동 등을 제한한 탓이다. 이 제한이 인종차별철폐협약을 소환하였다. 2017년 1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2018년 6월 카타르가 UAE를 각각 ICJ에 제소했다. 지금 한창 심리 진행 중이다.
 
이들 국가 안보 분쟁의 행로는 무엇을 시사하는가? 한·일 갈등이 이 선에서 정리되지 않으면 여러 법원을 오가는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예상치 못한 ICJ 절차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일도 이 협약 가입국이다. 물론 위 두 분쟁은 서로 벼랑 끝 다툼으로 이어진 것으로 지금의 한·일 분쟁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지금 양국 갈등 양상은 이 분쟁들의 초기 패턴을 따르고 있다. 일단 확전의 불을 꺼야 한다. 일본발 수출제한 스위치를 우선 내려야만 가능한 일이다.
  
수출 규제 멈춰야 미래 위한 타협 가능
 
이제 외교적 해결에 마지막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제일 급한 건 현상 유지(standstill) 합의다. 수출 규제, 대응 조치, 제소 등 모든 공방을 현 상태에서 동결해야 진지한 협의가 시작된다. 그다음 지금까지 나온 여러 제안의 변형과 조합으로 양측의 접점을 찾자. 쉽진 않지만, 일본이 원하는 ‘65년 체제 확인’과 한국의 목표인 ‘개인 배상 구현’의 교차점이 있을 것이다. 행여 외교적 노력으로 도저히 해법을 찾을 수 없다면 청구권협정에 따른 중재도 이제 상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첩첩산중 WTO 분쟁도 우리가 깃발을 들고 있는데, 그리고 어차피 다른 국제 분쟁 가능성도 이미 열려 있는데, 중재에 그렇게 부담을 느낄 필요가 있을까. 당연히 수출 규제 철회와 미반복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중재에 보통 2년 반이 걸린다. 우리 숙제를 위한 소중한 시간이다. 바로 소재·부품 국산화와 구입선 다변화 작업이다.
 
지난 50일이 50년을 삼켜버렸다. 이 정도에서 마무리되어야 한다. 더 나가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된다. 이제 6월 30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시작된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리셋 코리아 통상분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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