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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가 붉게 익을 때면 생각난다, 천사가 돼 떠난 그아이

중앙일보 2019.08.18 07:00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18)

태풍 영향으로 비가 오락가락하는 이맘때면 농촌에서는 고추를 수확하고 말리느라 정신없다. [중앙포토]

태풍 영향으로 비가 오락가락하는 이맘때면 농촌에서는 고추를 수확하고 말리느라 정신없다. [중앙포토]

 
8월이다. 말복과 입추가 지났다. 태풍의 영향권 끄트머리에서 어제부터 오늘까지 비가 내린다. 지금쯤 농촌에서는 잘 익은 붉은 고추를 수확하고 말리느라 정신없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붉게 잘 익은 고추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아픔이 있다.
 
내가 오성면 영인면 둔포면을 돌며 과일을 팔다 항상 해가 뉘엿뉘엿 떨어질 때 도착하는 마지막 마을이 시포리였다. 시포리로 한 주에 두 번 과일을 팔러 가면, 가장 먼저 달려와 나를 반겨주던 일곱 살 남자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눈에 보이지 않다가도 논둑이나 농수로 쪽에서 물에 돌멩이를 던지며 혼자 놀다 저 멀리 내 차가 보이면 달려와 반겼다. 그러면 나는 조수석에 아이를 태우고 마을을 돌았다. 나는 아이를 볼 때마다 왜 유치원에 가지 않고 혼자 위험하게 놀까 싶어 늘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이의 부모가 형편이 어려워 못 보낸 게 아닐까 짐작한다.
 
시포리에 과일을 팔러 갈때마다 나를 반겨준 일곱 살 남자아이는 고추밭에서 일당을 받고 일하는 농아 부부의 아들이었다. [사진 pxhere]

시포리에 과일을 팔러 갈때마다 나를 반겨준 일곱 살 남자아이는 고추밭에서 일당을 받고 일하는 농아 부부의 아들이었다. [사진 pxhere]

 
그날 아이가 튀어나온 방향을 돌아보니 거대한 고추밭 이랑이 보였다. 그곳에서 아이의 엄마와 아빠가 땡볕 아래서 붉은 고추를 따는 모습이 언뜻언뜻 보였다. 그 고추밭 주인을 나는 잘 알기에 그 부부가 일당을 받고 일하는 것임을 바로 알았다.
 
부모는 삼십 대 초반이었고 말을 못 하는 농아 부부였다. 1년 전 그 아이 손을 잡고 나와 과일을 산 기억이 있어 구면이었다. 아이는 해맑게 웃고 장난치고 했지만, 말을 하지 않아 목소리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아이 엄마는 둘째를 임신 중인지 배가 만삭이었다. 그 몸으로 삼복더위에 남편을 도와 고추를 땄다.
 
그 당시 나도 아이와 동갑내기 딸이 있었기에 아이는 내게 자식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마을에 가면 반드시 행하는 즐거운 습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온종일 고추밭 주변에서 혼자 놀던 그 아이를 두 팔로 번쩍 안아서 화물차 적재함 위로 올려주고, 손에 커다란 비닐봉지 하나를 들려주는 일이었다.
 
“이쁜 아들! 과일 먹고 싶지? 마음껏 담아. 아줌마가 주는 선물이야.”
 
언제나 그렇듯 아이는 입이 함박꽃처럼 피면서 겅중겅중 춤을 췄다. 제 몸보다 큰 수박도 껴안았다가 참외 박스도 낑낑 들어보려 하고, 토마토와 포도 복숭아를 들었다 놨다 하며 좋아 어쩔 줄 몰랐다. 아이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 쌓인 피로가 단숨에 날아가곤 했다.
 
나는 과일 사러 손님이 나오면 과일을 팔고 손님이 없으면, 아이와 신나게 놀다가 ‘아들, 항상 차 조심해라’ 일러주고 집으로 차를 돌리곤 했다. 그러면 아이는 한참이고 멀어지는 내 차를 보면서 뒤에서 손을 흔들었다.
 
태풍 영향으로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 후, 다시 그 마을로 차를 몰았다. 마을 초입에서부터 그 아이가 어디서 달려 나올까 기대하며 차를 서행했다. 그런데 마을이 조용했다. 아이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이가 어디선가 듣고 달려 나오도록 스피커 방송 볼륨을 좀 더 높였다.
 
천사 같았던 아이가 농수로에서 놀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는 채 피지도 못하고 그렇게 하늘나라로 떠났다. [중앙포토]

천사 같았던 아이가 농수로에서 놀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는 채 피지도 못하고 그렇게 하늘나라로 떠났다. [중앙포토]

 
그 순간, 마을 부녀회장님이 아이 집 쪽에서 헐레벌떡 달려 나오며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얼른 스피커를 끄고 차에서 내렸다. 부녀회장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이모, 마을이 왜 이렇게 조용해요?”
“아이고! 말도 마! 마을에 초상났어.”
 
나는 순간 불길했다.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세상에 이럴 수가! 그 천사 같았던 아이가 사고로 바로 오늘 저세상으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무너지고 흘러내린 농수로 공사를 모내기 전 대대적으로 하던 것을 나도 올봄에 보았다.
 
그 농수로 위에서 신발 벗고 놀다가 그만 발이 미끄러져 물속으로 휘말려 들었고, 아이 시신을 반나절 뒤에나 찾았는데, 급물살에 떠내려가다 물속에 깔아둔 비닐 속으로 밀려 들어가 끼어 있는 것을 어른들이 찾아냈다는 것이었다. 신발도 한 짝만 남아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이는 그렇게 채 피지도 못하고 엄마·아빠 품을 떠나 저 하늘 천사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아이가 살던 집을 올려다보니, 마당에 뭔가를 덮은 멍석이 보였다. 그 주변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렸다. 어린아이라서 내일 바로 화장터로 간다고 했다. 작은 천사는 거기에 누워있었다. 아이를 잃은 엄마의 울음소리가 마을을 휘감고 돌았다. 그것은 사람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새끼를 잃은 어미의 울음소리였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다시 몇 해가 지났고, 그때처럼 8월 중반을 지난다. 지금쯤 나의 천사는 어느 하늘을 날고 있을까. 부디 지금은 안전한 곳에 있기를! 아이의 명복을 거듭 빌면서 그때 내가 가슴으로 쓴 시를 꺼내본다.
 
시포리
한여름 부주의한 나태함은 언제나 위험하다
농수로 그 서늘한 안쪽에서
지나간 계절을 떠올리듯 이미 때늦은 일이다
젊은 여인 하나 고추 따던 바구니를 집어 던진 채
우두커니 물 깊이만 들여다볼 뿐,
유년을 놓친 조막 신은 수중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지
그 아기, 잠의 영원한 수면 속에서 더는 떠오르지 않았다
저녁 무렵, 방 한켠 까칠한 거적에 덮인 채
더는 회복되지 못할 식은 몸을 어루만지며
살아남은 가슴들은 어떤 슬픔을 다짐했을까
아이가 연기 한 움큼의 내력이 되어 꿈처럼 흩어질 때
허공 저쪽을 향해 어떤 망각을 다짐했을까
 
지금 시포리엔 고추 수확이 한창이다
마당 가득 붉은 그것을 펴 널던 여인 하나
그늘진 곳을 들춰 햇살을 밀어 넣다 그만,
매운 기억에 놀란 듯 엉겁결에 일손을 멈춘다
여인의 아리도록 매운 지난여름의 한때가
눈물을 타고서, 멈춘 시간 속으로 붉게 흘러내린다
 
김명희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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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희 김명희 시인·소설가 필진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 희망과 절망은 한 몸이고, 동전의 양면이다. 누구는 절망의 조건이 많아도 끝까지 희망을 바라보고, 누구는 희망의 조건이 많아도 절망에 빠져 세상을 산다. 그대 마음은 지금 어느 쪽을 향해 있는가? 우리는 매 순간 무의식 속에 희망과 절망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은 눈금 하나 차이지만, 뒤따라오는 삶의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희망도 습관이다. 절망을 극복하게 만드는 희망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최대 원동력이다. 그동안 길 위에서 본 무수한 절망과 희망을 들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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