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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장서 시켜 먹던 불어터진 짜장면이 ‘물 300’ 만든 힘

중앙일보 2019.08.17 13:00

[더,오래] 이인근의 당구 오디세이(12)

당구를 처음 접한 대학 시절에는 내기를 많이 했다. 몇 번만 연속해서 이기면 200까지는 쉽게 올라갔다. [사진 pixabay]

당구를 처음 접한 대학 시절에는 내기를 많이 했다. 몇 번만 연속해서 이기면 200까지는 쉽게 올라갔다. [사진 pixabay]

 
내가 당구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대학 시절이었다. 입학 동기 중 재수, 삼수를 하며 이미 당구를 경험했던 친구들을 따라 배웠다. 사십년이 더 지난 지금에 와서 기억에 남는 친구들의 모습 중에는 유독 당구장에서의 개성 있는 장면이 선명하다.
 
대학 시절 나의 치수는 150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시절에는 내기 당구를 많이 했다. 몇 번만 연속해 이기게 되면 당구 치수가 짜다는 이유로 쉽사리 인플레이션이 돼 200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주제를 벗어나 좀 엉뚱한 얘기를 하자면 나는 ‘운칠 기삼’의 신봉자다. 대개 이런 말을 하면 아무런 의지나 노력 없이 요행만 바란다는 오해를 한다. 내가 말하는 운 이란 ‘진인사 대천명’에서의 천명 또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중 하늘과 같은 의미를 가진 운이다.
 
인생 한 갑자를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경우 또 아주 중요한 인생의 변곡점에서 나의 실력과 노력 아닌 그 무엇인가가 결과를 달리 만드는 것을 경험하면서 받아들이게 된 겸허한 마음 자세인 것이다.


‘진인사’보단 ‘대천명’에 가까운 인생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제대 후 한달 만에 취직했고, 무탈하게 직장 생활을 수년간 했다. [사진 Pixabay]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제대 후 한달 만에 취직했고, 무탈하게 직장 생활을 수년간 했다. [사진 Pixabay]

 
우리 주변에 보면 잘 된 친구도 있고 그렇지 못한 친구도 있는데(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판단의 근거가 물적 자산이라 돈 좀 벌어 놓는 친구와 그렇지 못한 친구) 그 차이가 두, 세 배 이상일 경우 그들의 능력과 노력도 두, 세 배 차이가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조금 잘 된 친구가 자신의 운마저도 실력인 양 자랑하는 것을 보면 한없이 마음이 불편하다.
 
각설하고, 나는 운이 좋았다. 나는 대학 졸업 후 군대에 갔으며, 뭐가 그리 급했는지 제대 한 달 만에 취직했다. 그렇게 들어간 곳이 평생의 직종(직장은 동일 업종에서 세 번 옮겼다)이 돼 내게 삼십 수년간 밥벌이를 제공해 주었다. 고백하건대 치밀한 준비와 고민, 비상한 결단으로 사회생활을 해 온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사소한 상황에 밀려 혹은 시류에 편승해 그럭저럭 자존심만 상하지 않을 정도로 버틴 정도다. 다행히도 그 과정이나 결과는 그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한, 두 번쯤의 시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첫 직장에서 5년, 두 번째에서 또 5년 정도 무탈하게 직장 생활을 해오다 돈을 좀 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 동료 셋이서 의기투합하여 도원결의를 하며 회사를 세우기로 한 것.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한 돈키호테식 도전이었다.
 
한 일 년 동안 술 한 방울 안 마시며 밤늦도록 열심히 했더니 자리를 잡아 가는 듯했다. 삼, 사년 지나자 제법 안정되게 사업을 꾸려갈 만 하게 되었다. 오년 차에 접어들자 회사 규모도 커지면서 거래처들부터 접대 골프 요청도 들어왔다. 골프 연습장을 찾은 어느 날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바이어의 부도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 후 한 달 만에 회사가 버티기 어려워졌고, 종업원들을 내보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회사를 정리하지 못한 데엔 거래처들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다른 거래선을 개척한다는 이유가 있었다.
 

회사 어려울 때 직원들과 점심 내기 당구

회사를 차린 뒤 점심 시간은 또 다른 고민이었다. 그 시절 점심 값은 대개 상사의 몫이었다. [중앙포토]

회사를 차린 뒤 점심 시간은 또 다른 고민이었다. 그 시절 점심 값은 대개 상사의 몫이었다. [중앙포토]

 
당시 쉽게 정리할 수 없는 직원이 둘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둘 다 가장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회사에 일도 없이 앉아 있는 것이 힘들었는데, 점심시간은 또 다른 고민이었다.
 
동업자들은 이런 저런 핑계로 나가 버리고, 주변머리 없는 내가 주로 남아 직원들과 점심을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시절만 하더라도 점심값은 대개 상사의 몫이었다. 이런 생활이 여러 달 지속되면서 나도 호주머니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내가 꾀를 낸 것이 점심때 짜장면 내기 당구를 치자는 제안이었다. 그 이후로 호주머니 사정에 여유가 있으면 대강대강 하고, 없을 때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게임을 승리로 이끌곤 했다. 지금도 그중 한 사람과는 가끔 술자리를 하는데, 그때 이야기를 안줏거리로 삼곤 한다.
 
다행히도 10여 개월 후 새로운 바이어를 만나 사업이 정상궤도를 회복했고 순탄한 사업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골프는 더 이상 치지 않았다. 골프를 막 시작하던 즈음에 위기가 닥쳐서인지 징크스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은퇴한 내가 친구들에게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일화라고 눙을 치며 말하는 에피소드의 중심엔 불어터진 짜장면과 당구가 있다.
 
당시에 발휘한 고도의 집중력 때문인지 지금 나의 당구 치수는 ‘물 300’ 이다.

 
깨알 당구 팁
코끼리 남획으로 상아 수입에 비상이 걸리자 당구공 회사는 대용품 개발에 뛰어들었다. [사진 pixabay]

코끼리 남획으로 상아 수입에 비상이 걸리자 당구공 회사는 대용품 개발에 뛰어들었다. [사진 pixabay]



당구공, 상아값 치솟아 플라스틱으로 대체

19 세기 중반 미국 상류 사회에서 당구가 유행했다. 이때 사용된 당구공은 코끼리 상아였다. 코끼리 남획으로 코끼리 수가 줄어 상아 수입에 비상이 걸리자 당구공 회사에서 '당구공으로 쓸 상아의 대용품 현상 모집 1만 달러'를 내 걸었고 많은 사람이 대용품 개발에 뛰어 들었다.
 
이중 하이엇 형제가 나무 가루, 물에 불린 종이, 헝겊, 아교풀, 콜로디온 등의 여러가지 재료를 혼합해 반죽한 다음 단단하게 압축해 당구공과 같은 모양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콜로디온이 마른 후 공이 수축되는 등 문제가 생겨 상금은 일부 밖에 받지 못했다. 하이엇 형제는 틀니와 주사위 등을 만드는 재료를 사용해 당구공을 제작하면서 많은 돈을 벌어 들인다. 이후 단점을 보완하려고 노력는 이어졌고, 그 결과  지금의 플라스틱 공 시대를 열게 됐다.

 
이인근 전 부림구매(주)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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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근 이인근 전 부림구매(주) 대표 필진

[이인근의 당구 오디세이] 하루 당구장 내방객 120만명, 애호가 1200만명, 전국 골목 곳곳에 당구장 2만2000개, 세계 유일의 당구 전문 TV 채널…아마 한국은 당구를 세계에서 가장 사랑하는 나라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열풍의 주역은 바로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 세대다. 대학 시절부터 당구를 쳐온 애호가의 알량한 구력과 지식에 잡생각을 섞어 당구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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