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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더화이 러시아어 통역 맡은 마오 장남 죽자 소통 혼선

중앙선데이 2019.08.17 00:20 649호 29면 지면보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90>

마오안잉은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넜다. 초등학교 교사 류스치(오른쪽)와 결혼 4일 후였다. 1개월 후 미 공군이 투하한 소이탄에 목숨을 잃었다. 1950년 10월 8일 베이징. [사진 김명호]

마오안잉은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넜다. 초등학교 교사 류스치(오른쪽)와 결혼 4일 후였다. 1개월 후 미 공군이 투하한 소이탄에 목숨을 잃었다. 1950년 10월 8일 베이징. [사진 김명호]

외국과 무슨 일 할 때는 통역이 중요하다. 말 잘못 옮겼다가 일 복잡하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 고위외교관 중에는 최고통치자 통역 출신이 많았다. 지금도 그렇다. 1949년 6월 29일, 주한미군은 군사고문단 500여명을 놔둔 채 철수했다. 9월 19일, 소련홍군도 고문단 잔류시키고 북한을 떠났다. 숫자가 엄청났다. 남한의 미군고문 몇 배는 됐다.
 

저우언라이 “미군 인천 상륙 대비”
소련 고문단은 “상륙 가능성 없다”

마오안잉 대유동서 전사한 이후
새로운 통역관 의사 전달에 문제

스탈린의 건의 받은 저우언라이
장메이 남편 쉬지에판에게 맡겨

중국지원군 참전 초기, 지원군지휘부는 소련 고문들의 간섭에 불만이 많았다. 자존심 강한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사사건건 충돌했다. 소련고문단도 스탈린에게 전문 보낼 때마다 펑더화이를 깎아내렸다. “우리가 제시하는 작전방침이나 행동계획을 이해 못 한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건 알고 있었지만, 머리도 나쁘다. 회의 때마다 해괴한 전략전술 제시하며 우리 의견을 무시한다. 원칙성이 강한 사람이다. 한번 정하면 양보하는 법이 없다. 우리에게 서구식 군사 교조주의에서 탈피하라는 충고를 대놓고 한다. 웃으며 헤어진 적이 한 번도 없다.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하다.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다.” 스탈린은 고문들의 불평을 무시하지 않았지만, 믿지도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진출하자 중국은 당황했다. 전쟁으로 잔뼈가 굵은 지휘관들이 머리를 맞댔다. 결론을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에게 보고했다. 저우는 보고서를 스탈린에게 전달했다. 미군의 인천 상륙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인천 지역에 견고한 방어태세를 준비하라”는 중국의 권고를 소련 고문들은 무시했다.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경고는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7월 중순에서 9월 초순까지 세 차례 북한을 설득했다. “해상을 통해 인천에 상륙하면 남쪽으로 내려간 조선인민군은 후로가 차단된다. 적시에 북쪽으로 철수해서 주력을 보존해야 장기전에 승리할 수 있다.” 참전을 준비하던 동북변방군13병단 사령관 덩화(鄧華·등화)의 분석은 구체적이었다. “조선인민군은 전선이 남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미군은 해군과 공군이 강하다. 조선은 동쪽에서 서쪽이 짧다. 해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잘라버리면 위험하다.” 8월 13일, 덩화와 훙쉐즈(洪學智·홍학지)가 린뱌오(林彪·임표)에게 연명으로 보낸 보고서도 큰 차이 없었다.
  
스탈린, 인천 상륙 이후 중국 지휘관 더 신뢰
 
쉬지에판과 장메이. 쉬지에판은 빼어난 항공전문가였다. 하얼빈 공정학원 교수를 끝으로 퇴임했다. 장메이와 린뱌오 사이에 태어난 자녀를 직접 양육했다. 1958년 여름, 하얼빈. [사진 김명호]

쉬지에판과 장메이. 쉬지에판은 빼어난 항공전문가였다. 하얼빈 공정학원 교수를 끝으로 퇴임했다. 장메이와 린뱌오 사이에 태어난 자녀를 직접 양육했다. 1958년 여름, 하얼빈. [사진 김명호]

동북변방군의 보고서를 읽은 린뱌오는 무릎을 쳤다. 저우언라이 통해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냈다. 스탈린은 린뱌오의 전략에 혀 내두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김일성과 소련 고문들을 재촉했다. 전과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미군의 상륙 가능성은 없다.” 연합군의 인천 상륙 1주일 전인 9월 8일, 참모총장 네룽쩐(聶榮臻·섭영진)의 분석은 마지막 통보나 다름없었다. “미군의 적극적인 반공(反攻)이 멀지 않았다. 여러 징후 분석한 결과 인천이 확실하다.”
 
소련 고문들은 중국 측의 여러 차례에 걸친 분석을 여전히 무시했다. 하도 듣다 보니 북한군은 손을 썼다. 인천과 서울 지역에 방어 준비를 했다. 급조한 부대이다 보니 전투력이 약했다. 남침 3일 만에 점령했던 서울에서 인천 상륙 3일 만에 쫓겨났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 이후 스탈린은 북한주재 고문단보다 펑더화이와 중국 지휘관들을 더 신뢰했다. 펑더화이를 매도하는 고문들에게 펑더화이의 착오나 결점을 구체적으로 적시해 보내라고 지시했다. 답변이 왔다. “지적할 만한 결점이나 작전상 착오는 없었다.” 스탈린은 통역 때문이라고 직감했다. 중국 측에 펑더화이의 통역을 바꾸라고 건의했다.
 
펑더화이의 첫 번째 러시아어 통역은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모안영)이었다. 마오안잉은 준재였다. 청년 시절도 중국인들이 “가장 바람직한 전 중국의 통치자 감”이라 여기던,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큰아들 장징궈(蔣經國·장경국)와 흡사했다.
 
마오안잉은 열네 살 때 중국을 떠났다. 10년간 소련에서 온갖 신산(辛酸)을 삼켰다. 어린 나이에 이마노프 국제아동보육원에서 더 어린 동생 보살피며 책을 끼고 살았다. 원장이 억지로 떠안긴 소년대 대장도 능청맞게 해냈다. 1939년 봄, 열일곱 살 때 콤소몰(레닌주의 청년공산주의자동맹)에 가입해 지부 서기에 뽑혔다. 실물보다 사진으로 더 익숙한 부친처럼 의지가 강했다. 목숨 내거는 일도 피하지 않았다. 1941년 나치를 상대로 소련의 위국(衛國)전쟁이 폭발하자 참전을 자원했다.
  
마오 장남, 14세부터 10년간 소련서 고된 삶
 
생일날 북한이 선물한 한국 전통복장 입고 쑥스러워하는 펑더화이. 오른쪽이 동북 인민정부 주석 가오강(高崗). 왼쪽은 중국 주재 북한 대사 이주연. 1951년 10월 24일 함흥. [사진 김명호]

생일날 북한이 선물한 한국 전통복장 입고 쑥스러워하는 펑더화이. 오른쪽이 동북 인민정부 주석 가오강(高崗). 왼쪽은 중국 주재 북한 대사 이주연. 1951년 10월 24일 함흥. [사진 김명호]

당시 소련은 중국 정부 요청으로 중국 청년들의 소련군 입대를 허락하지 않았다. 마오안잉은 소련군 정치부 주임을 찾아갔다. 정치부 주임은 마오안잉이 누구 아들인지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 보냈다가 죽기라도 하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참전 대신 군사학교 입학을 권했다. 2년 후 소련군 중위 계급장 달고 볼셰비키에 가입했다. 군사학에 매력을 느꼈다. 모스크바의 프룬제 군사학원에 진학했다. 세계적인 군사학원 재학 중 탱크 연대 당 대표를 맡았다. 지금의 벨라루스와 폴란드, 체코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스탈린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아들답다. 꼬마 마오(少毛)로 손색이 없다.” 1946년 1월 중공 근거지 옌안(延安)으로 귀국할 때 손잡이가 예쁜 권총 한정을 선물했다.
 
마오안잉은 자원병 1호였다. 사령부에 근무하며 소련 고문들과의 통역을 전담했다. 소련인들은 러시아어에 막힘이 없고, 소련 사정에 밝은 중국 청년을 좋아했다. 오해나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11월 25일, 마오안잉이 대유동에서 전사했다. 새로 온 통역은 의사전달에 문제가 많았다. 전방 지휘관들의 불만이 잇달았다.
 
스탈린의 건의를 받은 저우언라이가 새로운 통역을 물색했다. 치타 총영사 쉬지에판(徐介藩·서개번)만 한 인물이 없었다. 펑더화이에게 의견을 물었다. 펑더화이가 질색했다. “내가 감히 쉬지에판을 통역으로 쓰다니 말도 안 된다. 게다가 장메이(張梅·장매)의 남편이다. 딴사람을 찾아봐라.” 장메이는 린뱌오의 전 부인이었다.
 
쉬지에판은 학력과 경력이 화려했다. 황푸군관학교와 광저우(廣州) 항공학교, 레닌그라드홍군항공학교, 모스크바 동방노동자 공산주의 대학 학적부에 이름을 남겼다. 코민테른 동방부와 소련홍군 작전참모도 역임한 소련 전문가였다.
 
저우언라이는 장메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메이는 모스크바에서 린뱌오를 차버리고 의과대학에 입학한 당찬 여인이었다. 자신도 의료요원으로 지원하겠다며 저우를 안심시켰다. 쉬지에판은 총리가 제의한 지원군 총사령부 판공실 주임직을 수락했다. 소련 고문단은 쉬지에판을 어려워했다. 단순한 통역으로 대하지 않았다. 펑더화이와의 관계도 원만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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