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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작품도 ‘심플’했던 장욱진, 오향장육에 고량주 즐겨

중앙선데이 2019.08.17 00:20 649호 27면 지면보기

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화가 장욱진. [중앙포토]

화가 장욱진. [중앙포토]

장욱진(1917~90)을 설명하는 숱한 글들은 장욱진이라는 존재의 단순함 앞에서 요령부득이 되고 만다. 그의 삶도 그의 작품도 넘침이 없다. 캔버스 위에는 불필요한 조형과 표현은 다 소거됐다. 최소한의 조형과 표현만이 겨우 남은 화면은 심심하고 헛헛하다. 장욱진의 삶도 그러했다.
 

단단한 의지로 미니멀리즘 실천
소금 안주에 ‘깡소주’ 마시기도

경성제이고보 동기 유영국과 교유
아무 말 없이 헤어져도 진한 우정…

최불암, 촌로의 모습 장욱진 관찰
‘전원일기 김 회장’ 연기 때 활용

미니멀리즘은 대체로 추상미술에 적용된다. 미니멀리즘의 정의를 넓혀 이를 구상미술에서 구현한 화가가 있다면 장욱진을 들 수가 있다. 최소한의 크기, 최소한의 재료, 최소한의 표현으로 이루어진 그림이었고 삶이었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심플’이다. 단순한 삶을 살아가며 이를 단순한 조형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세속을 초월하려는 단단한 의지와 절제력이 요구된다. 그는 특유의 강한 체질과 결연한 실천으로 심플함을 구현했다.
 
그는 작업실을 여러 군데 옮겨 다녔다. 그의 화력에는 덕소시대, 수안보시대, 신갈시대라는 지명이 따라다닌다. 그런데도 그의 생활과 활동기반은 줄곧 서울 명륜동이었다. 명륜동에 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시내가 가까워 술을 마시기에도 좋았다. 혹시 술을 마시다 실수를 해도 수습이 되는 공동체적 구역이었다. 장욱진을 알아보는 이웃이 많은 안전지대였다. 이웃으로 아동문학가 마해송(1905~66)이 있어 둘이서 산보를 즐겼다. 화랑이 많은 인사동이 멀지 않아서 좋았다.
  
제자 이민희, 화가 오수환 등 술친구로
 
장욱진은 말수가 적었다. 교유관계가 허전했다. 임완규(1918~2003), 김창억(1920~97), 이대원(1921~2005), 권옥연(1923~2011) 등 수많은 화가를 배출한 경성제이고보(경복고)의 동기인 장욱진, 유영국 두 사람의 공통점은 과묵이었다. 두 사람이 만나면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서 있다 헤어진다. 말이 없어도 진한 우정의 친구였다. 장욱진은 제이고보를 중퇴하고 양정고보를 졸업한 뒤 도쿄의 제국미술학교(현재의 무사시노미술대학)에서 공부했다.
 
6·25전쟁이 끝나고서 유영국(1916~2002)의 약수동 집에 6개월간 가족이 신세를 진 일이 있었다. 이때는 생활인 장욱진으로 돌변해 잡지에 삽화도 그리는 등 새로운 거처를 구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의 평생은 대체로 생산적인 활동과는 멀었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동양서림을 경영한 부인 이경순(1920~)의 헌신이 컸다. 장욱진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비생산성 사이에서 효율적인 접점을 찾았다. 대학교수로서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부인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다 주었다. 겨자씨만 한 1부짜리 다이아몬드가 보일락말락 하는 반지였다. 부인은 뜻밖의 선물에 감동했다. 장욱진에게는 그림도 선물도 최소의 크기로 최대의 감동을 안겨다 주는 놀라운 재능이 있었다. 고도의 집중력을 가진 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기량이었다.
 
그가 즐겨 먹었던 오향장육. [중앙포토]

그가 즐겨 먹었던 오향장육. [중앙포토]

과묵의 장욱진에게 엉뚱한 친구들이 있었다. 술친구들이었다. 제자들이 술친구가 되어 주었다. 제자인 부산의 연탄공장 사장 아들 이민희가 술자리에서 장욱진을 잘 보필했다. 나중에는 화가 오수환(1946~) 등이 술친구로 추가됐다. 장욱진은 1954년부터 60년까지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다. 이 무렵 장욱진의 집은 혜화동 로터리 우리은행 뒤에 있었다. 이 일대에서 유일한 자그마한 초가집이었다. 장욱진의 집에 가려면 실개천의 좁은 다리를 건너야 했다. 한 칸 크기의 행랑채가 화실이었다. 앉은뱅이 책상 위의 깡통 속에 붓 몇 자루가 전부였다. 이젤조차 없었다. 60촉짜리 백열등이 6호쯤 크기의 캔버스를 비추고 있었다. 서울대 교수의 화실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소박했다. 이 집은 나중에 2층 양옥으로 개조되어 1층을 살림집으로, 2층을 화실로 썼다. 새 화실에는 석유난로와 다리가 긴 세발의자가 놓여졌다.
 
1972년까지 서울대 미대는 이화사거리에 있었다. 지금의 홍익대 대학로 캠퍼스 자리다. 서울미대에서 명륜동 장욱진의 집 사이에는 크고 작은 술집이 많았다. 대부분이 장욱진의 단골이었다. 월급을 받는 날은 술집의 외상값을 갚는 날이었다. 이날은 공짜술이 나왔다. 그 술맛이 기막혔다.
 
서울의대 정문 옆에 있었던 중국식당 진아춘, 공락춘은 호사를 누리고자 작정했을 때만 가는 귀한 곳이었다. 50년대, 60년대까지 중국식당은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70년대로 접어들어서야 진아춘, 공락춘이 대학로 일대에서 서클활동, 야학하던 대학생들의 만만한 출입처가 될 수 있었다. 가끔은 큰딸 경수를 데리고 명동의 중국식당으로 진출했다. 딸에겐 물만두를 시켜주고 자신은 오향장육에 고량주를 마셨다.
 
장욱진은 집에서는 반찬을 가리지 않았다. 주는 대로 나오는 대로 먹는 스타일이었다. 미니멀리스트인 그에게 불평은 과잉의 감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취향이 분명했다. 필요 이상의 안주는 싫어했다. 술 역시 최소의 양으로 최대의 취기에 다다를 수 있는 고량주를 좋아했다. 이 경우 궁합이 가장 잘 맞는 오향장육을 시켰다. 가끔은 학림다방에 들러 ‘위티’를 마시기도 했다. 위티는 홍차에 국산 도라지 위스키를 탄 음료였다.
 
장욱진이 가장 만만하게 드나든 술집으로 우리은행 뒷골목에 있는 공주집이 있었다. 바로 집 앞이었다. 충남 공주 근처 청양 출신으로 장욱진 연배의 여성이 하는 두 평 남짓한 주막인데 시인묵객들이 제법 드나들었다. 요리는 간단했다. 돼지머리나 두부에 막걸리이기가 일쑤였다. 주로 오수환이 술친구가 되어 주었다. 오수환은 화가 이만익(1938~2012)과의 인연으로 장욱진과 가까워졌다. 근처의 보성고교 교사로 있으면서 대학로 대로변에 작업실을 갖고 있어 장욱진과 만나기가 수월했다.
  
한 달씩 곡기 끊고 술만 마실 땐 붓 놓아
 
장욱진의 작품‘모기장(The Mosquito Net)’, 캔버스에 유채, 21.6x27.5cm, 1956. [사진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장욱진의 작품‘모기장(The Mosquito Net)’, 캔버스에 유채, 21.6x27.5cm, 1956. [사진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장욱진은 한 달씩이나 일체의 곡기를 끊고 술만 마실 때도 있었다. 그럴 땐 그림을 전혀 그리지 않았다. 나중에 병원에 입원해서야 술을 끊었다. 몸이 회복되면 금주 상태에서 그림만 그렸다. 평균적인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특이한 체질이었다. 장욱진의 부친은 충청도 연기에서 유명한 씨름꾼이었다. 힘이 장사였다. 장욱진도 고보 재학시절 높이뛰기, 스케이트 등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장욱진은 젊은 시절 말고는 힘을 과시한 적이 없다. 오히려 힘이 없어 보였다. 힘을 안으로 뭉쳐 내공으로 담아 두었다. 그 내공을 술을 마실 때나 그림을 그릴 때만 꺼내어다 썼다. 한번은 음주 삼매경으로 접어든 장욱진을 찾아 미술평론가 석도륜(1926~2011)이 명륜동 집을 찾았다. 미감이 까다로운 장욱진도 석도륜의 전각은 좋아해서 벽에다 걸어 두었다. 마당에는 그동안 마신 빈 술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딸 경수는 아버지가 술 마시는 게 싫었고 또 그런 아버지를 찾아오는 친구도 싫었다. 석도륜에게 아버지를 향한 불평의 매정한 언사가 나왔다. 무안을 당한 듯한 표정의 석도륜이 물러섰는가 싶었는데 다시 돌아왔다. “네 아버지는 그냥 술꾼이 아니야. 주선(酒仙)이시지. 그러니 너무 매정하게 대하면 안 된다.” 딸과 아버지를 화해케 하는 한마디였다.
 
일상의 그는 딱 촌로의 모습이었다. 큰 키에 헐렁한 웃옷을 아무렇게나 걸친 수수한 차림이었다. 장욱진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상재한 김형국(1942~)을 따라 탤런트 최불암이 수안보의 장욱진 화실을 찾은 적이 있었다. 최불암은 장욱진의 수더분한 모습과 동작을 눈여겨보고 외웠다. 촌로 장욱진의 모습은 텔레비전 드라마 ‘전원일기’ 속에서 아버지 김 회장 역을 맡은 최불암의 명품연기로 재탄생하여 전 국민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었다. 알고 보면 어딘가 눈에 익은, 우리랑 참 가까운 화가 장욱진이었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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