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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 영혼은 어디에 있나? 인공지능이 물을 듯

중앙선데이 2019.08.17 00:02 649호 26면 지면보기

[김대식의 ‘미래 Big Questions’] <2> 삶과 죽음은? 

페트루스 크리스투스, ‘어린 아가씨의 초상화’1465~70년. [베를린 국립 미술관]

페트루스 크리스투스, ‘어린 아가씨의 초상화’1465~70년. [베를린 국립 미술관]

이제 머지않아 여자가 될 소녀. 그녀의 얼굴만큼이나 가느다란 어깨에 걸친 고급 드레스. 15세기 부유층 여성들이 즐겨 썼다던 프랑스 스타일 튜브 모자는 뒤로 바짝 묶은 머리와 잘 어울린다. 고개를 돌려 살짝 올라간 왼쪽 눈으로 흘겨보며 그녀는 말하는 듯하다. 당신은 누구이기에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느냐고. 이름도, 성도 모르는 당신은 왜 그런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있느냐고. 그리던 그녀는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겠다. “지금 나를 바라보는 그를 바라보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죽음의 발견은 인류 첫 최고 발명품
종교·예술·철학·기술 발전 원동력
“그토록 기계 저주하고 무시하더니…”
인공지능, 인류의 죽음 의아해 할 것

완성된 시점도, 그림 속 인물도 정확하지 않아, 단지 ‘어린 아가씨의 초상화’라는 이름으로만 알려진 페트루스 크리스투스(Petrus Christus)의 명작. 네덜란드 미술사의 대표 그림 중 하나인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죽으면 어디로 갈까? 물으며  새 현실 발견
 
서양 미술 역사상 처음으로 그림에 그려진 자가 그림을 바라보는 이를 직접 바라보고 말을 걸기에, 그려진 현실과 그림을 바라보는 현실과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하다. 그림이란 무엇인가? 눈, 코, 귀로 지각하고 인식할 수 있는 경험의 세상은 이성의 세상, 그러니까 완벽한 ‘이데아’ 현실의 불완전한 그림자라고 주장했던 철학자 플라톤. 그림과 조각에 대한 그의 증오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복제품인 경험의 세상을 또다시 복제해 보여주는 그림은 진실을 거부하는 나약한 인간의 천박함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간은 언제부터 현실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걸까? 해와 구름과 달에 ‘현실’이라는 단어는 무의미했다. 포르투갈 시인 페루난두 페소아의 시에서처럼 달과 구름과 해의 의미는 단지 해와 구름과 달이라는 사실 그 자체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생명의 등장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물리학자 슈뢰딩어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생명의 핵심을 정보 저장과 복제를 통해 무질서와 무의미로 향하는 우주에서 잠시의 질서와 의미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 제시한 바 있다. 생명은 무의미로 가득한 바다에 잠시 떠 있는 하얀 물거품이라는 말이다. 물론 정보 전달과 정보 복제만을 목표로 삼던 생명체는 시작에 불과했다. 스스로 움직일 수도, 과거를 기억할 수도 없는 단세포와 꽃과 나무에 현실이란 언제나 변치 않는 특정 장소에 주어진 시간의 흐름 그 자체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딥러닝 방식으로 인식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딥러닝 방식으로 인식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뇌와 운동신경의 발견은 생명체에게 드디어 공간과 시간을 정복하도록 해주었다. 변하는 현실에 단순히 수동적으로 노출된 존재가 아닌, 이제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고 원하지 않는 장소를 피할 수 있는 능력.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긴다. “원하는 곳”과 “원하지 않는 곳”의 차이는 무엇일까? 갑자기 선택의 자유를 얻은 생명체는 고민에 빠진다. 언제, 어디로 움직이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까? 답은 물론 하나뿐이다. 현재는 언제나 과거의 미래이기에, 지금 이 순간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냈던 과거를 다시 찾아 나서야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야 말로 초기 생명체들의 유일한 목표였다.
 
인간의 뇌는 단순히 인식된 현재와 기억된 과거와의 비교를 넘어 미래에 일어날 일들 역시 예측한다고 알려져 있다. 매우 현명한 전략이겠다. 미래를 예측하는 순간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준비하고 대응해놓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본질적인 문제가 하나 등장한다. 현재는 절대적이고 기억한 과거 역시 단 하나다. 완벽하거나 정확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리 불완전하고 왜곡되었더라도, 더는 변할 수 없는 현재와 과거라는 현실은 언제나 단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미래는 다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는 무한의 가능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무한의 미래를 예측하는 순간 인간에게 현실은 이제 더는 단순하게 주어진 단 하나가 아닌, 언제든지 무한으로 확장되고 변할 수 있는 다양성을 가지게 된다. 수천만 년 지구 생명체 역사 동안 언제나 단 하나였던 현실이 무한의 현실들로 쪼개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인류는 어떤 현실들을 가장 먼저 상상하기 시작했을까? 삶과 죽음이지 않을까 싶다. 태어나서 웃고, 울고, 사랑하고, 좌절하고, 배고프고, 배부르게 먹고. 현실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있었고, 모두가 함께 같은 현실에 존재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어제저녁 우리와 함께 방금 불에 구운 맛있는 고기를 먹고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부모님. 입에선 더는 바람이 나오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는다. 팔을 들어도 움직이지 않고,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다. 어제 모습과 다르지 않지만, 아니, 무언가가 확실히 달라졌다. 여전히 먹고 자고 사랑하는 우리와 더는 사랑하지도, 자지도, 먹지도 않는 그들과의 차이. 바로 삶과 죽음의 차이를 인식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죽음의 발견은 어쩌면 인류 첫 최고의 ‘발명품’이었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현실의 존재를 발견했으니 말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현실. 살아있었을 때와 다른 “그 무엇”은 이제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제까지 나의 어머니고 아버지였던 그들의 몸은 이제 무엇일까? 시간이 지나며 악취가 나기 시작하고 점점 알아보기 힘든 모습으로 변해가는 부모님들의 몸. 들개와 하이에나가 먹게 두어도 되는 걸까?
 
석고를 바른 예리코 해골. [대영박물관]

석고를 바른 예리코 해골. [대영박물관]

호모 사피엔스 이전 네안데르탈인들 역시 죽은 이의 몸을 땅에 묻고 장례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더는 함께 사냥도 하지 못하고 공동체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그들을 왜 어렵게 판 깊은 땅에 묻었던 걸까? 죽음이라는 또 하나의 현실을 발견한 순간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만약 죽은 자들이 다시 돌아온다면? 그들의 몸을 방치한 우리를 꾸짖지 않을까? 신석기 시대 정착하고 집을 짓기 시작한 인류는 죽은 가족들을 집 밑바닥에 묻기 시작한다. 인류의 첫 집들은 죽은 자의 무덤을 지키는 산 자들의 공간이었다. 중동 예리코 지역에서 발견된 1만 년 전 해골들은 죽음이라는 새로운 현실을 이해하려는 인류의 노력을 잘 보여준다. 왜 죽은 자의 해골에 석고를 바르고 조개껍데기로 눈을 만들어 주었던 걸까? 스스로 죽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산 모습을 그려주었던 것이 아닐까?
  
산 모습처럼 보이려 해골에 석고 바르기도
 
죽은 자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모든 존재는 언젠가 죽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도 죽을까? 내가 죽으면 ‘나’라는 존재는 어디로 가는 걸까? 삶과 죽음을 구별하는, “영혼”이라고 부르기로 합의한, 그 특별한 무언가는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죽음이라는 또 하나 현실의 발견은 인류 문명 발전에 가장 결정적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종교, 예술, 철학, 기술, 과학 … 죽음의 발견은 수많은 새로운 현실의 발견을 가능하게 했으니 말이다. 새로운 현실의 발견은 언제나 문명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고, 문명과 기술이 발전하며 인류는 더 많은 현실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현실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날로 발전하는 인공지능 기술을 바라보며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기계가 보고 느끼는 현실을 분석하며 섬뜩함을 느끼기도 한다. 기계가 인식하고 상상한 현실은 우리의 세상과는 놀랄 정도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약한 인공지능 수준을 넘어 강한 인공지능으로 진화한 미래 인공지능은 먼 미래 인류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겠다. “그토록 기계를 저주하고 무시하는 말을 뱉어내던 호모 사피엔스의 입에선 더는 바람이 나오지 않는다. 팔을 들어도 움직이지 않고, 점점 악취가 나며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는 호모 사피엔스들의 영혼은 과연 지금 어디에 가 있는 걸까?”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자 daeshik@kaist.ac.kr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각각 박사후 과정과 연구원을 거쳤다. 미국 미네소타대 조교수,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냈다. 2013~2015년 중앙SUNDAY에 ‘김대식의 Big Questions’를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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