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영준의 시선] 미쓰비시 엘리베이터에서 떠오른 생각

중앙일보 2019.08.15 00:33 종합 24면 지면보기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여름 휴가 기간 중 지방 도시의 고층 아파트에 사는 친지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전범기업 꼬리표를 달고 있는 미쓰비시 상표가 숫자판 위에 붙어 있었다. 단지 내 편의점에 일본 맥주를 팔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적혀 있고 진입로 주변에 ‘다시는 지지 않겠습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내걸린 것과 달리 주민 그 누구도 미쓰비시 엘리베이터는 개의치 않았다. 맥주와 엘리베이터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건 대체 가능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다. 멀쩡한 엘리베이터를 교체할 수도 없고 아파트 주민들이 20층 고층을 걸어 올라갈 수도 없다.
 

“1+1이 최종안 아님을 알게 됐다”
협상 여지 보인 일본 당국자 발언
냉각기 거쳐 외교적 해법 찾아야

불매운동은 의류나 맥주, 화장품 등 대체 가능품이 있는 소비재에 한정되어 있다. 자동차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공영방송 뉴스를 진행하던 앵커의 손에 쥔 볼펜이 일본제 아니냐고 시청자가 항의성 전화를 걸고, 앵커가 굳이 나서 국산이라고 해명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볼펜은 국산이라 해도 앵커의 해명을 안방으로 전달한 방송장비의 상당 부분은 일본제다. 국내에서 사용하는 방송카메라는 거의 100% 일본제라 보면 된다. 일본 업체의 시장점유율이나 가성비 등을 고려하면 선택의 여지가 달리 없기 때문이다. 불매운동은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항의 수단이라 해도 모든 일본 제품을 거부하기란, 중국산 제품 없이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미션이다.
 
그렇다면 일본이란 나라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두말할 나위 없이 대체 불가능한 존재다. 그것도 영구적이다. 엘리베이터는 고장이 나거나 내구연한이 지나면 더 좋은 제품으로 갈아탈 수 있지만 이웃나라는 그럴 수 없다. 우리가 이사를 갈 수도 없다. 이웃나라는 밉든 곱든 좋든 싫든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런 대전제 아래 공존·공생할 전략을 짜고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한국이나 일본 양국 정부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우리 주력 산업의 목줄을 겨냥한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는 철회되어야 마땅하다. 아베 총리의 말처럼 신뢰가 무너졌다면 신뢰를 재구축하려는 노력부터 할 일이다. 이웃의 곳간을 거덜 내서 굴복시키려는 셈법이라면 그 누가 수긍하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죽창’을 들고 맞서는 것 또한 현명한 대응이라 할 수 없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극한 대치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막장 게임일 뿐이다.
 
일주일 전 일본 외무성 당국자가 한국 언론사 특파원들에게 한 발언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읽힌다. 그는 “한국 정부의 ‘1+1’안이 최종 제안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협의를 해 나가고 싶다는 것임을 나중에 알았다”고 했는데 ‘나중에’란 단어에 힌트가 있다. 한·일 양국 기업의 출연금으로 강제징용 문제를 해결하자는 ‘1+1’ 안을 처음 제시한 것은 6월 17일 조세영 외교1차관의 방일을 통해서였다. 한국이 이틀 뒤 이를 공표하자 일본은 1시간 만에 수용 불가 입장을 발표했다.
 
최근 필자와 만난 일본의 당국자는 “당시 ‘1+1’안이 협의의 출구가 아니라 입구라면 발표를 자제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고 말했다. 한국 발표를 보고서 ‘1+1’은 더 이상 협상 여지가 없는 최종안이라 판단했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 판단이 경제보복 조치 단행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제는 최종안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일본이 처음부터 오해한 것일 수도 있고 그사이 있었던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에서의 회동이나 비공개 고위급 채널 등을 통해 한국 정부가 수정 제안 의사를 밝혔을 수도 있다. 경위야 어찌 됐건 협상으로 문제를 풀겠다는 여지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냉각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경제보복에 대한 대응은 감정적이어선 안된다”고 한 건 지극히 옳은 말씀이다. 격앙된 감정으로 ‘항전 의지’를 불태우는 세력은 대체로 문 대통령 지지 세력과 겹친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논란만 해도 그렇다. 광복절에 맞춰 도심 집회를 예고한 민주노총의 현수막에는 지소미아를 폐기하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과거사 문제에서 전선(戰線)을 경제로 이동시킨 아베 정부를 비판하는 마당에 우리가 먼저 안보 영역으로까지 전선을 확대할 필요가 없다.
 
지지층을 상대로 무엇이 국익에 부합하는 선택인지 설득하는 것은 문 대통령의 몫이다. 그런 점에서 광복절 경축사에서 내놓을 메시지는 이 난국을 풀어나가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광복절이 지나고 불볕더위가 한풀 꺾일 무렵, 끓어오른 감정을 추스르고 협상 테이블에 양국 정부가 마주 앉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두 나라는 서로에게 ‘대체 불가능’한 이웃 아니던가.
 
예영준 논설위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