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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혔던 독립운동가 1000여 명 살려낸 재야사학자의 집념

중앙일보 2019.08.14 00:09 종합 20면 지면보기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이 집에서 항일독립 투사 관련 기록을 보고 있다. 그는 100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발굴, 이 중 200여 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사진 경남독립운동연구소]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이 집에서 항일독립 투사 관련 기록을 보고 있다. 그는 100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발굴, 이 중 200여 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사진 경남독립운동연구소]

경술국치 한 해 전인 1909년 지리산 일대에서 전국 최대 규모의 의병이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의병장은 경남 하동군 악양면 출신의 박매지(1882~1909·혹은 박인환으로 불림)였다. 박 의병장은 1908년 10월 박동의 경남창의대장이 산청에서 전사한 뒤 최고지도자가 됐다. 그를 따르는 의병 수가 400여 명에 달했다.
 

‘영호남 항일투쟁사’ 쓰는 정재상씨
지역신문·문서고 등 찾아 발굴
200명은 독립유공자 인정 받아
“후손들에게 합당한 예우 해야”

그는 지리산 일대에서 이름난 명포수였다. 일본 헌병대도 그의 이름만 들으면 두려움에 떨 정도로 ‘최고의 저격수’였다. 박 의병장은 1909년 7월 22일 진주 대평면 신풍에서 일본군과 격전 도중 순국했다. 정부는 그에게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박 의병장은 당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를 발굴해 독립유공자로 재조명하고 우리의 기억 속으로 불러들인 사람이 있다. 바로 재야사학자인 정재상(54)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이다.
 
정 소장은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1000명이 넘는 독립운동가를 발굴했다. 그중에서 200여 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올해도 하동 출신 3명, 전남 출신 10명, 광주 출신 9명 등 22명이 건국훈포장 등 정부 포상을 받게 됐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지리산 주변 영·호남 일대에서 의병을 규합해 끝까지 일제와 맞서다 전사한 산청 출신 박동의 경남창의대장과 1909년 전국 최대 규모의 의병을 지휘한 하동 출신 박매지(박인환) 의병장, 합천 출신 이차봉 형제, 남원 출신 이평국 3부자 등이 정 소장이 발굴한 대표적인 항일독립투사다. 1919년 광주 학생 3·1운동을 주도한 하동 출신 홍순남 여사, 1927년 제2의 하동 3·1운동을 주도한 강대용·여국엽·여태원 선생 등도 정 소장이 없었더라면 잊혀졌을 독립유공자이다.
 
정 소장은 1993년 지역신문인 하동신문에 기자로 입사한 뒤 독립유공자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 해 광복절을 앞두고 독립유공자 관련 기획기사를 작성하려 했는데 자료나 전문가를 찾기 힘들어 포기했다. 이듬해 신문사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자 1년 뒤 다른 지역신문사를 직접 창간해 본격적으로 독립유공자를 찾아 나섰다.
 
처음에는 교사 출신이자 향토사학자인 고(故) 여재규 선생이 쓴 하동군사에 언급된 몇몇 독립운동가들이 단서가 됐다. 그러나 거기에는 ‘OO출신 OOO, 일본군에 체포돼 귀순 권유에 불복하다 총살됐다’는 정도의 간략한 내용만 있었다. 정 소장은 이런 기록을 갖고 지역신문이나 읍면 사무소 문서고 등을 뒤졌다. 그리고 국가기록원 등을 찾아다니며 당시 재판 기록이나 각 경찰서에서 올린 첩보문서, 밀정이 올린 문서, 헌병대 등이 올린 문서 등을 찾아 정리했다. 정 소장은 “기록이 한글로만 된 것이 아니고 한자나 일본어 등과 혼용돼 있어 처음에는 자료를 파악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6월에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국민포장을 수상했다. 2017년에는 경상남도 문화상을 받았다. 현재는 그동안 수집한 여러 자료를 중심으로 영호남 항일투쟁사를 집필 중이다.
 
정 소장은 “독립운동가 후손과 지역 어른이 ‘도움 줘서 고맙다’ ‘자네 참 존경하네’라고 할 때마다 힘을 내서 이 작업에 매진한 것 같다”라며 “목숨을 내놓고 헌신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렵게 사는 데 우리가 그들에게 합당한 예우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위성욱 기자 w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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