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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주의 시선] “예스 재팬, 노 아베”

중앙일보 2019.08.12 00:19 종합 28면 지면보기
권혁주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얻을 것 많은 해프닝이었다. 서울 중구청이 ‘No Japan’ 깃발을 명동 등지에 설치했다가 거둬들였다. 시민의 반발에 부닥쳤다. “순수한 시민운동을 왜 정부가 개입한 것처럼 만드는가” “개싸움은 국민이 한다. 정부와 지자체는 냉정함을 지켜라”라는 등의 의견이 쏟아졌다. 상인들은 “관광 안 오면 타격받는 건 일본이 아니라 우리다. 자살골 넣지 말라”고 항의했다.
 

정부, 국민의 이런 지혜 들리는가
“배격할 건 보복 일삼는 아베 정권
일본 국민은 우군으로 만들어야”

페이스북에 “경제판 임진왜란이 터졌다. 전쟁 중에는 관군·의병의 다름을 강조하기보다 이기는 데 집중해야 한다”라는 글을 올리며 버티던 서양호 중구청장은 결국 깃발을 내렸다. 이 해프닝 안에서 몇몇 사실을 재확인했다. 우리 국민은 지혜로운 화두를 던졌다. 한·일 경제 관계, 자치행정, 그리고 대일본 전략에 대해서다.
 
#1. 아이러니다. 중구청이 주문한, ‘No Japan’ 깃발을 찍은 건 일본제 인쇄기였다. 무토(武藤)사의 ‘VJ 밸류젯’이라는 기계다. 결과적으로 ‘경제·산업 측면에서 일본은 미우나 고우나 같이 가야 할 이웃’이라는 점이 은근히 재부각됐다. KBS 앵커가 “이 볼펜은 국산”이라고 한 장면을 촬영한 카메라는 십중팔구 일본제였을 것이다. 서대문구청이 쓰던 일제 문구와 사무용품을 묻었을 때도 복사기는 남겨놓지 않았을까. 반대로 삼성전자의 반도체 없이는 일본 전자제품 역시 품질을 보장하기 어렵다. 한국과 일본은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다.
 
사실 이는 대부분 나라가 마찬가지다. 세상에 모든 제품과 부품·소재를 다 만드는 자급자족 국가는 없다. 그렇다고 해도 한·일 두 나라는 한층 더 밀접하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기술 교류가 많다. 국가 정체성과 관련해서는 당당히 맞서되, 필요 이상의 감정싸움을 벌여 경제·산업 협력에 금이 가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일본의 치졸한 경제 보복에 우리가 발끈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2. 서 구청장이 반일의식 고취에 여념이 없던 그 날을 전후해서다. 일본 지자체 대표들이 한국 항공사들을 찾았다. 일본 가는 관광객이 줄어 우리 항공사들이 일부 노선을 철수하려 하자 붙잡아 보려고 달려온 것이었다. 나가사키현은 한술 더 떴다. 부지사가 제주항공에 신규 취항을 요청했다. 한쪽은 자발적으로 오는 관광객마저 걷어차려는데, 상대방은 어떻게든 관광객을 더 불러 모으겠다고 한다. 일본 지자체에 점수를 더 주고 싶다. 대다수 국민 의견도 다르지 않을 듯하다. ‘No Japan’ 깃발을 걸겠다는 중구청에 “오는 일본인들을 잘 대해 일본 극우파의 주장을 무력화시켜야 한다”라고 충고한 게 우리 국민이다.
 
#3. 그간 정부와 정치권은 ‘No Japan’으로 일관하다시피 했다. 의병, 죽창가, 도쿄 여행금지구역 지정, 올림픽 보이콧 등등 일본 전체를 배격했다. 야당은 여당 대표가 일식집에서 식사한 것을 비판하며 ‘No Japan’ 대열에 합류했다.
 
국민은 훨씬 현명했다. 한 줄로 압축했다. ‘Yes Japan, No Abe.’ “배격할 건 한국 대법원 판결을 빌미 삼아 경제 보복을 하는 아베 정권이다. 일본 국민은 우군 삼아야 한다”는 의미다. 격하게 공감한다. 일본 국민의 지지 없이 아베 정권이 보복을 마냥 이어가기는 힘들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와 정치권은 일본 국민마저 자극해 싸움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전략 부재다. 아니, 전략을 치밀하게 세우기는 했을까. “강경 대응은 총선에 긍정적”이라던 여당 씽크탱크 보고서가 새삼 떠오른다.
 
서울 중구청과 관련해 네티즌은 특유의 신상털기도 했다. ‘전쟁·관군·의병’을 거론한 서 구청장이 병역 면제자라는 점이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서 구청장이 중앙선관위에 “국가고시와 질병, 행방불명 등의 사유로 6차례 입영을 연기했고, 시력 장애로 군 복무를 하지 않았다”고 신고한 게 회자했다. ‘행방불명’에 서린 사정이 궁금해 중구청에 물었더니 “알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신상털기는 해프닝 속의 해프닝일 뿐이다. 중요한 건 ‘Yes Japan, No Abe’다. 국민이 던진 화두를 청와대와 정치권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다. 다행히 ‘닥치고 No Japan’은 자제하는 분위기가 정부와 정치권에서 언뜻언뜻 비친다. 그러나 낙관하기엔 이르다. 정권 핵심인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이순신 장군의 시구를 따 “서해맹산(誓海盟山)의 정신으로 소명을 완수하겠다”라고 지명 소감을 밝혔다. 속마음은 알 길 없으나 듣는 이들의 해석은 대체로 일치한다. 뜬금없이 죽창가를 틀었던 그가 소감을 빌어 일본에 강경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국민의 지혜가 정권 핵심부의 귀에 들어가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남았나 보다.
 
권혁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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