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기업·중기 의리 협업, 세금 혜택…소재 왕국 일본의 비결

중앙선데이 2019.08.10 00:21 648호 12면 지면보기
일본은 수치심의 나라다. 수치심은 가정·회사·국가·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제 역할을 못했을 때 생기며, 이는 일본 특유의 ‘와(和)’를 깨뜨렸다고 생각한다. 『국화와 칼』을 쓴 루스 베네딕트의 말마따나 이런 수치심과 열등감은 국가 통치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특히 일본의 개화기 국제사회에서의 ‘변경(邊境)성’에서 비롯된 수치심은 일본이 비주체적 열등의식에 빠지게 했다. 미국 페리 제독에 떠밀린 강제 개항,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 아편전쟁 이후 홍콩 할양, 청·일 전쟁 이후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간섭 등은 일본에 큰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일본 경쟁력 ‘모노즈쿠리-장인정신’
메이지 이후 150년간 기술 축적
20세기말 신흥국 약진으로 위기

법 만들어 고유 기업문화 복원
행정부처 세액공제 등 지원 총력

특허 장벽으로 후발국 진입 봉쇄
제조업 11개 부문 중 9개 한국 앞서

이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등의 계몽사상가들이 등장해 ‘탈아론(脫亞論)’과 ‘화혼양재(和魂洋才)’ 이념을 설파하며 일본의 변신을 주문했다. 특히일본 입장에서 산업기술은 세계의 ‘중심부’로 진입하기 위한 지름길이었으며, 메이지유신 이후 150년간 기술 개발에 천착한 원동력이 됐다. 일본은 메이지유신과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화학·기계·소재 분야에서 오랜 노하우를 쌓았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1960~80년대 일본은 ‘설계·개발→부품→조립·제조→판매→애프터서비스’로 나뉜 글로벌가치사슬의 중간 단계인 부품·조립·제조를 담당했다. 미국은 초기와 말단인 설계·개발·판매·애프터서비스에 집중했다. 일본은 부품·조립·제조 분야를 독식하며 미국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당시 글로벌 가치사슬은 ‘역스마일커브’ 형태였다.
 
80~90년대 들어 사정이 달라졌다. 한국·대만 등의 약진으로 글로벌 분업구조가 세분화하며 가치사슬은 설계를 비롯한 핵심 기술과 판매망 같은 플랫폼을 장악한 나라가 돈을 더 잘 버는 ‘스마일커브’ 형태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일본도 원천기술 개발과 플랫폼 확장에 나섰지만 주도권 확보에 실패했다. 예컨대 일본 기업은 반도체와 관련해 3만개 넘는 특허를 보유했지만, 통신·설계 등 340여 핵심 특허를 가진 인텔에 밀렸다. 미츠비시·소니 등은 70~80년대 기술 표준에 천착했지만 대부분 좌절하고 말았다.
 
다급해진 일본은 소재·부품 분야에서라도 경쟁력을 지키기 위해 ‘모노즈쿠리(物作り) 기반 기술 진흥 기본법’을 만들어 설계·압축형성·압출성형·기계 등 26개 분야 지원에 나섰다. 더불어 구식 문화 취급을 받던 모노즈쿠리를 브랜드화해서 세계에 알렸다. 여러 사회·문화 현상이 물적 토대 위에서 세워지듯 일본의 기술력과 ‘모노즈쿠리’ 문화도 일본 정부의 법과 제도의 지원 속에서 꽃을 피웠다. 일본 정부는 1999년 경제산업성 장관 주도로 특정 연구·개발(R&D) 계획을 수행하고 기술자 연수, 특허권 관리 지도 등을 지원을 하는 한편, 이를 백서 형태로 해마다 점검하고 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여러 행정부처가 공동으로 세제 혜택과 행정, 자금 지원에도 나서고 있다. 모노즈쿠리 기반 기술에 선정된 기업에 R&D 비용을 법인세액의 25%(2017년 기준) 한도로 공제해주고 있다. 연구비 증액에 따라 6~14% 공제 혜택을 부여하고, 시험연구비가 평균 매출액의 10% 넘을 경우 세액공제의 상한을 최대 10%로 높여준다. 국책 연구기관이나 대학, 중소기업 등과 특별 시험연구에 나설 경우 비용의 20~30%를 공제해 준다. 2006년에는 시대 변화를 반영해 ‘중소기업 모노즈쿠리 기반 기술 고도화에 관한 법률’도 만들어 지원 품목을 조정했다. 이런 지원 덕에 제조업 11개 부문의 비교우위지수에서 일본은 9개 부문에서 한국을 앞서고 있다. 특히 기계부품과 비금속광물 부문은 한국을 두 배 수준으로 압도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일본 제조업 경쟁력은 90년대 글로벌 가치사슬 변화와 일본의 중장기 기술 육성 전략이 들어맞은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대기업-중소기업 간 탄탄한 연대도 일본의 소재·부품 경쟁력을 높이는 또 다른 축이다. 가치사슬 각 부문에 있는 기업들이 수십~수백년간 상호의존적 관계를 맺어왔다. 심지어 일종의 주종관계처럼 중소기업의 소재 개발과 납품이 대기업의 경쟁력 향상으로 이어지는 봉건주의적 ‘의리인정(義理人情)’ 관계가 산업계 전반에 형성돼 있다. 모노즈쿠리 기반 기술 진흥 기본법도 이런 문화를 독려하기 위해 산업 집적 활성화를 지원한다.
 
예컨대 전지재료 회사 히타치카세이가 2차전지 음극재 분야의 강자로 성장한 것은 수요처인 산요가 공고한 협력자가 된 영향이 컸다. 단순한 원·하청 관계가 아니라 기술 개발부터 소재 가공·조립, 공정에서의 업무 협의와 ‘미세 조정(스리아와세, 擦り合わせ)’까지 서로 협력한다.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교수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는 기업 간 신뢰가 생기면 개발 노하우는 물론 사업 전략까지 공유할 정도로 긴밀히 협력한다”고 설명했다. 박용삼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일본 소재 업체들은 제품 개발 초기부터 고객사와 협업하는 ‘ESI(Early Supplier Involvement) 전략’을 구사하고, 완제품 업체들은 암묵적 구매 약속과 기술·자금 지원으로 힘을 보탠다”고 말했다.
 
후발주자가 따라오지 못하도록 높은 진입장벽을 쌓는 것도 경쟁력을 유지하는 비결 중 하나다. 일본은 주요 소재 기업의 해외 매각이나 합작 투자를 배제하고 있다. 인력 유출도 통제한다. 원재료의 배합이나 처리 공정 등을 감춰 ‘역설계(Reverse engineering)’ 시도를 차단한다. 기초 소재 개발에는 다년간의 노하우가 절실한데, 일본 기업들은 기술 단계마다 ‘특허 장벽’을 쌓아 경쟁자의 진입을 원천봉쇄한다. 세계 액정 시장을 좌우하는 독일 머크도 이런 방식으로 한국·중국·일본 등의 추격을 뿌리쳤다. 박 수석연구원은 “일본에서는 한국이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한 원동력으로 일본의 조기 퇴직 인력을 한국 기업이 대거 흡수한 것을 꼽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일본 기업에서는 소수정예 인력만 핵심 기술에 접근할 수 있으며 소재 분석을 통한 역설계를 피하기 위해 성분이 아닌 제조 노하우를 암묵지 형태로 블랙박스화했다”고 설명했고, 후카가와 교수는 “반도체 소재·부품 분야에서 탈일본을 선언한 한국이 한동안 시행착오를 겪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굴뚝’에서 ICT·AI·IoT로…모노즈쿠리의 진화
1999년 일본의 ‘모노즈쿠리 기반 기술’은 주조·열처리·용접·도장 등 26개 전통 제조업 영역에 국한됐다. 당시 법률이 공업제품의 설계, 제조업 발전을 지원하는 범용성 있는 기술로 한정해서다. 그러나 정보통신기술(ICT)의 발달, 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빅데이터를 비롯한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의 진화 등으로 모노즈쿠리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지난 6월 11일 내놓은 392쪽짜리 ‘2019년 모노즈쿠리 백서’를 보면 글로벌 경제 여건 악화와 일본 모노즈쿠리의 고민, 과제가 곳곳에 나타나 있다. 글로벌 경기 둔화와 미·중 무역전쟁, 대중 수출 감소 등에 따른 중소·중견 기업의 실적 악화를 우려하고 있다.
 
특히 일손 감소에 따른 중장기 산업 경쟁력 약화 고민이 컸다. 일본의 제조 업체 수는 1989년 42만2000개에서 2016년 19만1000개로 줄었다. 이에 따라 일본 제조현장에서의 신기술 도입 목적은 산업 경쟁력 유지와 일손 감소 대응으로 명확히 설정돼 있다.
모노즈쿠리(物作り)
물건을 뜻하는 ‘모노’와 만들기를 뜻하는 ‘즈쿠리’를 합성한 용어다. ‘혼신의 힘을 쏟아 최고의 물건을 만든다’는 뜻으로, 장인정신을 중시하는 일본의 독특한 제조문화를 일컫는 말이다. 일본 제조업의 혼(魂)이자 일본의 자존심을 상징한다.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구독신청

공유하기
Innovation Lab
Branded Content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