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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에게 당했다, 손쓸 틈이 없었다

중앙선데이 2019.08.10 00:20 648호 17면 지면보기

안충기의 삽질일기 

작년에는 옥수수 거둘 시기를 놓쳤다. 오랜 시간 삶아 안심하고 씹다가 이빨 나갈 뻔 했다. 올해도 때를 놓쳤지만 그래도 먹을 만하다. 토마토는 풍년인데 봄부터 곁순을 제대로 쳐준 덕이다.

작년에는 옥수수 거둘 시기를 놓쳤다. 오랜 시간 삶아 안심하고 씹다가 이빨 나갈 뻔 했다. 올해도 때를 놓쳤지만 그래도 먹을 만하다. 토마토는 풍년인데 봄부터 곁순을 제대로 쳐준 덕이다.

‘호구’
 
지난주, 대파 서리 맞은 삽질일기가 포털에 올라간 뒤 달린 첫 댓글이다. 파하하하 다시 웃음이 터졌다. 맞는 말이다. 작성자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사흘 만에 댓글을 지웠다. 그냥 놔둬도 되는데.
 
서리의 악몽은 내게 처음이 아니다. 서울로 이사하기 전, 신도시에서 농사짓던 11년 동안 툭하면 당했다. 쥔장이 분양해서 관리하는 밭이 아니었고, 인적이 드물기도 했다. 이번에는 서울서 주말농사 지은 지 10년 만에 처음 당한 일이었고, 애교 수준이 아니라서 마음이 적잖게 상했다. 그러니 한해 농사 지어 길 위에서 말리던 고추나 벼를 하룻밤에 털리는 농민들 심정은 오죽할까.
 
2005년 5월5일 어린이날이었다. 새벽에 밭에 가니 이상했다. 누가 다녀갔다. 땅이 아무리 넓어도 주인은 돌멩이 하나의 자리도 다 기억하는데, 기껏 열 평 남짓한 밭 한쪽이 휑했다. 상추가 뭉텅 뽑혀나갔다. 서둘러 훑어간 흔적이었다.  
 
쥔장 밭에서 자라는 토란. 8월이 되자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 옆은 내가 심은 머위.

쥔장 밭에서 자라는 토란. 8월이 되자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 옆은 내가 심은 머위.

그전 해 늦가을 일이 떠올랐다. 할머니 셋이 내 밭에 주저앉아 토란대를 거두고 있었다. 내가 심은 토란이었다. 셋은 나를 보고 주춤거리면서도 계속 자르고 다듬었다. 한 사람은 바로 옆 밭 할머니였다. 철이 지났는데도 거두어가지 않기에 주인이 없는 줄 알았다나. 변명을 늘어놓으면서도 손에서 토란대를 놓지 않았다. 뻔히 알고 지내는 사이라 더 기가 막혔다. 천연덕스러움이 놀라웠고 두꺼운 낯에 감탄했다. 나머지 둘은 할머니 교회친구라고 했다. 좋은 토란이 있으니 같이 가서 거두자고 자랑삼아 데리고 온 모양새였다. 말이 되냐고, 한바탕 푸닥거리라도 해야 마땅하지만 대차게 나가지 못했다. 토란대는 모두 주어 보내고 토란은 캐서 가져왔지만 불쾌했다.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은 없었다. 이빨 빠진 상추 이랑을 보니 토란 할머니가 생각났다. 그런데 그 밭에도 잘 자라는 채소가 있는데 내 밭을 탐할 이유가 있을까.  
 
서리는 계속 됐다. 반대쪽 이랑의 상추가 또 사라지고, 아욱과 적겨자채가 없어졌다. 이러다가 헛농사 짓게 되나 싶었다. 한 달 쯤 뒤, 옆 밭에서 할머니가 김을 매고 있기에 하소연을 했다. 이 분은 토란대 할머니 반대 쪽 밭주인이다.
 
장마 전에 뿌려놓은 상추가 싹이 텄다. 한여름 파종은 성공확률이 희박한데 기적 같은 일이다.

장마 전에 뿌려놓은 상추가 싹이 텄다. 한여름 파종은 성공확률이 희박한데 기적 같은 일이다.

“아니 거기도 그랬능교. 말도 마이소 마 내 작년에는 호박 구경도 못했다 아잉교” 할머니의  진한 사투리 억양이 홱 높아졌다. 반갑게도 동지를 만났다. 그러고 보니 전 해에 나도 애호박을 따먹어 본 일이 별로 없다. 예년과 달라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별다른 의심을 하지는 않았는데.
 
서리꾼은 흔적을 남겼다. ▶흘린 채소 잎 상태로 보니 출몰시간은 새벽 ▶지난번과는 반대쪽을 뽑아간 걸로 보아 동일인이야 ▶가까운데 사니 수시로 오가겠지 ▶통로 쪽 채소만, 흙을 털지도 못하고 넣어가는 걸 보니 소심하군 ▶흙 위에 선명하게 찍힌 여자 발자국은 240㎜. 새벽잠 없는 할머니가 틀림없다. 옆 밭 할머니는 내 추리에 동의하며 용의자가 사는 아파트 이름까지 콕 찍었다.
 
미친 땡볕 아래서 포도알은 굵어간다. 한 알 따서 어금니로 터트리니 시큼하다. 눈물이 찔끔났다.

미친 땡볕 아래서 포도알은 굵어간다. 한 알 따서 어금니로 터트리니 시큼하다. 눈물이 찔끔났다.

그때 저쪽 언덕에서 여성 둘이 무언가를 뜯으며 천천히 내 밭쪽으로 왔다. 햇빛가림 모자와 긴팔 옷으로 무장하고 있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커다란 마트 봉지를 두개씩 들고 있었다. 혹시? 전기가 찌르르 흘렀다. 동지 할머니도 긴장하고 있었다. 우리 편 둘에 저쪽 편 둘, 쪽수로도 밀리지 않으니 든든했다. 그쪽도 우리를 흘끗거리며 무언가를 속삭였다. 우리가 철수하면 작전을 개시할 생각일까.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그들은 좀 체로 우리 쪽으로 오지 않았다. 장기전이 되겠다는 느낌이었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 땡볕에 변변찮은 복장으로 우리가 얼마나 버티겠냐는 비웃음 같았다. 땅은 금세 달아올랐고 속옷이 금방 축축해졌다. 밀짚모자가 아쉬웠다. 대치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칠순 넘은 동지가 먼저 두 손을 들었다.
 
“저 아지매들 잘 좀 지켜보소” 나직하게 말하고는 일어섰다. 아…안 돼요. 저 혼자는 무서워요. 동맹의 한 축이 떨어져 나가자 저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줌마들이었다. 중2보다 무섭다는 이 땅의 아줌마 둘이 거침없이 내 밭으로 넘어왔다. 팔뚝의 솜털이 쭈뼛 섰다.
 
이 밭 좀 봐, 없는 게 없네(탐나는 게 많다는 얘기군), 머위도 있어 쌈 싸먹으면 되게 맛있는데, 저절로 난 건가(심지 않은 머위가 어떻게 난단 말인가). 조~기 조~ 상추 말이지 반들반들 한 게 아주 좋아(아니 내 흑상추 맛을 봤다는 말이네, 얼떨결에 자백을 하다니)
 
그런데 밭을 샅샅이 살피던 그들이 그냥 지나가려는 낌새였다. 내가 버티고 있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날 더운데 뭘 뜯으러 다니냐고 말을 붙였다.
 
“쑥이요, 쑥”
 
삽질일기

삽질일기

손에 들고 있는 봉지엔 쑥이 그득했다. 이런, 순간 판단 착오로 애꿎은 아줌마 둘을 도둑으로 몰 뻔 했다. 집에 돌아와 전말을 이야기하니 아이가 말했다.
 
“아유 아빠, 그분들이 우리 흑상추 보고 맛있다고 할 때 좀 드셔보시라고 했어야죠. 그러면 혹시 범인이라도 감동해서 다음에 안 뜯어갈 거 아녜요”
 
돌아보니 그때부터 나는 이미 호구였다.
 
그림·사진·글=안충기 아트전문기자 newnew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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