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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일본의 도발…‘3차 반도체전쟁’의 서막?

중앙선데이 2019.08.10 00:20 648호 31면 지면보기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옛날 춘추시대 패자였던 제환공(齊桓公)이 사소한 다툼 끝에 채나라 공주인 부인을 쫓아 보냈다. 얼마 후 그는 부인을 다시 불러오려 했지만 이미 재가한 뒤였다. 화가 난 환공은 채나라를 치려고 관중(管仲)과 상의했다. 관중은 말렸지만 환공은 듣지 않았다. 그러자 관중이 말했다.
 

반도체부터 걸고 넘어진 일본 도발
20년 주기로 벌인 반도체대전 조짐
과거 이 전쟁 승리자였던 한국업계
국내조력자 미흡해 힘든 싸움 될 듯

“그럼 먼저 ‘초나라가 천자에게 성실하게 조공하지 않았다’는 명분을 들어 초나라로 출병하십시오. 초나라에서 화해를 청하거나 항복하면 이를 받아들이고 그 군사를 채나라로 돌려 ‘의로운 군대가 일어났는데 돕지 않아 벌한다’는 명분으로 공격하십시오. 전쟁엔 명분이 중요합니다.”
 
세상에 명분 없는 전쟁 없고, 속셈 없는 전쟁도 없다. 명분은 대개 그럴듯하고 어떨 때는 정의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명분은 대체로 찌질하고,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속셈을 가리는 위장막이다. 그러니 전쟁을 장악하려면 ‘명분’에만 몰입해선 안 된다.
 
이번 일본이 도발한 경제전쟁은 명분이 찌질하지만, 그 속셈과 효과를 다각도로 냉정하게 분석할 필요는 있다. 일본의 속셈에 처음 고개가 갸웃해졌던 건 첫 조치가 반도체 관련 3개 품목의 수출규제라서였다. 한국이 가장 아파할 품목을 선택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제3차 반도체대전’의 서막은 아닐까. 산업현장 일선취재에서 오래 떠나 있었던지라, 그동안 업계동향을 업데이트하고 흐름을 살펴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렇게 반도체에만 국한시켜 보니 이번 대법원판결이 아니었어도 지금쯤 반도체전쟁이 벌어졌을 것으로 보였다.
 
우선 시기가 공교롭다. 마이크론(미국)은 2017년 일본 히로시마 공장에 20억 달러를 투입하면서 2019년 상반기까지 한국수준의 D램 양산체제 완결을 선언했었다. 올 상반기면 기술과 생산공정에서 한국과 ‘맞짱’ 뜰 수 있다는 거다. 이 공장은 마이크론이 엘피다를 인수해 얻었다. 엘피다는 일본 정부 주도하에 D램을 재건하겠다며 미쓰비시·NEC·히타치 D램 부문을 합병해 2000년 출범했지만 파산하고, 2013년 마이크론에 매각됐다. 마이크론은 이 공장을 최첨단 생산기지로 삼고, 세계 최대 D램 단일생산라인을 조성하는 등 막대한 투자를 해왔다. 이렇게 두 나라는 메모리에 관한 한 운명공동체가 됐다. 미국·일본이 편먹고 한국 반도체를 손보자고 작당했다면, 시기적으로 지금이 적기다.
 
선데이 칼럼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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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반도체를 경계하고 싶은 이유도 찾아보면 많다. 세계 메모리시장의 72%, 너무 커버린 한국. 중국에 산업의 쌀인 반도체를 부족함 없이 대주는 한국. 내년엔 D램을 양산한다지만 몇 세대 뒤진 제품밖에 못 만드는 중국. 그러니 한국 반도체만 잘 손보면 중국 첨단 전자산업에 일정한 타격을 줄 수 있다.
 
돌이켜보면, 세계 산업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싸움은 모두 반도체전쟁이었다. 1차대전은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미국과 일본의 싸움이었다. 당시 일본 메모리가 세계 시장의 80%대를 휩쓸자 미국 업계가 힘을 합쳐 제재에 나서면서 시작됐다. 이 싸움엔 일본 정부까지 뛰어들어 이때 ‘주식회사 일본’이라는 말도 나왔다. 그 결과 전쟁에 기운을 뺀 미국·일본 메모리업체들이 무더기로 문을 닫았고, 위상도 확 떨어졌다. 이 와중에 새로 등장한 메모리 강자가 한국이었다.
 
2차대전은 내가 반도체업계를 출입했던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에 걸쳐서였다. 이때는 가격파괴를 통한 치킨게임과 통상전쟁 양상이었다. 빅딜후유증으로 매각 위기까지 몰렸던 하이닉스는 글로벌 업계의 주 타깃이었다. 유럽·미국·일본 등이 날만 새면 한국반도체를 WTO에 제소하고, 가혹한 반덤핑관세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결과는 유럽·일본 업체들이 와르르 무너졌고, 그 후 시장은 삼성전자·하이닉스·마이크론 3사 과점체제로 개편됐다. ‘패배는 곧 죽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막장까지 가는 게 반도체전쟁이다.
 
두 차례 전쟁에서 한국은 승리의 기억밖에 없다. 현장기자 당시 시장정황은 숨 막혔지만, 한국이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현대가 설립했던 하이닉스는 기술의 국산화를 상당히 이룬 경험을 통해 극심한 자금난 속에서도 극한 기술개발로 버텨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엔 디자인하우스나 장비·소재 개발에 나서려는 야심찬 반도체 기술 진영이 있었고, 나름의 반도체 생태계가 존재했다.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내부 조력자가 돼줄 반도체 생태계의 존재가 미미한 것도 걱정이다. “너무 큰 나무 아래는 그늘이 깊어 풀조차 자라지 못한다”는 업계의 하소연이 나온 지 오래됐다. 양대 반도체기업은 분기별로 조 단위의 이익을 냈지만 국내 반도체 생태계에 투자하지 않았고, 소재와 부품을 싼값에 조달하는 데 유리한 ‘글로벌밸류체인’에 의존했다. 일본(어쩌면 미·일 연합세력)은 이 고리를 끊어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적들이 우리의 약점을 모르겠는가.
 
글로벌한 우정이란 믿을 게 못 된다. 이익이 다소 낮아도 내부의 조력자, 우리 팀을 키워 자생할 수 있는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반복된 지적도 이젠 흘러가 버렸다. 어쨌든 지금 전쟁은 시작된 듯하고, 이 역시 이겨야만 한다. 다른 방도가 없다. 한국 수출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반도체가…. 다른 시나리오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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