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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드는 여름밤, 국악 선율과 수제 맥주에 취하다

중앙일보 2019.08.09 00:02 종합 20면 지면보기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틀 뒤면 말복이다. 휴가를 맞아 피서지에 가서도 한낮에는 햇볕 아래서 노는 것도 고역이다. 차라리 밤에 놀자. 뭐 하고 노느냐고? 문화재 야행(이하 야행)이 있다. 선선한 밤, 우리네 문화재를 감상하며 알찬 프로그램을 즐기고 야식으로 출출함도 달랠 수 있는 행사가 전국서 펼쳐진다. 지난 2일 강원도 강릉 야행을 보고 왔다.
  

네 돌 맞은 강릉 문화재 야행
대도호부 관아 일대 7만 명 운집
농악공연·버스킹 이틀간 이어져
서부시장선 강릉 전통 음식 체험

경포대·안목항 아니라 구도심
 
무더위를 피해 바다나 계곡을 찾는 것도 좋지만 모처럼 문화재를 관람해보는 건 어떨까. 휴가철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문화재 야행’이 펼쳐진다. 지난 2~3일 강릉 대도호부 관아서 열린 문화재 야행에는 6만9000여명이 방문했다. 최승표 기자

무더위를 피해 바다나 계곡을 찾는 것도 좋지만 모처럼 문화재를 관람해보는 건 어떨까. 휴가철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문화재 야행’이 펼쳐진다. 지난 2~3일 강릉 대도호부 관아서 열린 문화재 야행에는 6만9000여명이 방문했다. 최승표 기자

대형 호텔 늘어선 경포대, 강원도 최대 수산물 집산지인 주문진, 커피 거리로 뜬 안목항. 관광객이 주로 찾는 강릉 명소는 이런 곳이다. 한데 지난 2~3일 밤에는 바닷가가 아니라 평소 관광객 발길 뜸한 구도심이 들썩였다. 야행을 보기 위해 6만9000여명이 명주동·임당동 일대로 모여들었다.
 
문화재 야행이 뭐길래 야단일까. 창덕궁 달빛 기행, 경복궁 별빛 야행은 들어봤을 터이다. 야행은 이런 궁궐 야간 개방 프로그램에서 파생했다. 한데 다른 점이 많다. 인원 제한이 없고 예약이 필요 없고 입장료도 없다. 궁궐 관람이 차분한 분위기인 반면 야행은 자유롭고 활기차다. 2016년 강릉을 포함해 전국 10개 도시가 야행을 시작했는데 3년 차인 올해는 27개 도시로 확대됐다.
 
강릉 야행의 주 무대는 ‘대도호부 관아’다. 고려·조선 시대 영동지방 행정 중심지였던 강릉에서 관리들이 업무를 보던 공간이다. 대도호부 옆에 임영관 삼문(국보 제51호), 칠사당(강원도 시도유형문화재 제7호)이 있고 길 건너에 임당동 성당(등록문화재 제457호) 같은 문화유산도 있다. 강릉시가 야행 무대로 구도심을 활용한 이유다. 지난 2일 휴가차 강릉을 찾은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변화는 있고 변함은 없다’는 말로 야행을 설명할 수 있다”며 “시민이 나서서 문화재를 오늘로 가져오는 행사를 기획한 점이 놀랍다”고 말했다.
 
야행은 야경(夜景), 야설(夜說), 야식(夜食) 등 8가지 주제로 이뤄진다. 전국 모든 야행이 똑같다. 강릉에서는 올해 35개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창덕궁 달빛 기행처럼 정해진 동선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즐긴다.
 
오후 6시, 야행이 시작됐고 대도호부 부사 부임 행사가 이어지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하늘이 어둑해지면서 사람들 손에 들린 청사초롱 불빛이 밝아졌고 조명을 받은 옛 건물 단청 색깔이 그윽해졌다.
  
강릉 시민이 들려주는 진짜 사투리
 
강릉농악보존회의 농악 공연. 최승표 기자

강릉농악보존회의 농악 공연. 최승표 기자

“강릉이라 경포대는 관동팔경 제일일세. 모시적삼 젖혀들고 연적같은 젖을주오.”
 
대도호부 관아 마당에서 모내기하며 농요를 부르는 공연이 펼쳐졌다. 강원도 무형문화재인 ‘학산오독떼기’다. 농민들의 애환이 절절한 노랫가락에 고스란히 담겨 전해졌다. 이어진 강릉농악보존회의 농악 공연은 빙 둘러싼 관객 모두가 손뼉 치며 흥을 즐겼다. 임당동 성당서 진행된 국악 공연은 이채로웠다. 가야금, 해금 소리가 천장 높은 성당에서 깊은 공명감을 내며 청중을 압도했다. 소극장 ‘단’에서 열린 사투리 콘서트도 인기였다. 농민, 식당 주인 등 일반 강릉시민이 마이크를 잡았다.
 
강릉 야행은 문화재뿐 아니라 인근 공공기관 건물까지 활용했다. 한국은행 강릉본부가 전국 최초로 화폐 전시실을 야간 개방했고, 중앙동 우체국에서는 우표 전시와 우표 만들기 체험이 진행됐다. 김일홍(52)·한지윤(24) 모녀는 “전통차 체험이 인상 깊었고 학창 시절 이후 처음 해본 줄 넘기도 즐거웠다”고 말했다.
한복을 입고 수제 맥주를 즐기는 외국인 관광객. 최승표 기자

한복을 입고 수제 맥주를 즐기는 외국인 관광객. 최승표 기자

 
대도호부 관아만큼 북적거린 장소가 있다. 서부시장과 저잣거리였다. 마침 서부시장에서는 수제 맥주 페스티벌이 열렸고 옛날 주막 분위기로 꾸민 먹거리 장터도 마련됐다. 시장과 저잣거리 한편에서는 버스킹 공연이 이어졌다. 2001년 시청 이전 뒤 쇠락한 시장에 모처럼 활기가 돌았다.
 
야행은 얼핏 보면 한바탕 축제 같다. 그러나 문화재청이나 강릉시는 한사코 축제가 아니라 한다. 그럴 만하다. 지역 축제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디언 공연단, 터키 아이스크림 파는 장사꾼이 없다. 유명 가수도 초대하지 않고 노래대회도 안 한다. 심오섭 강릉문화원 사무국장은 “강릉 야행은 90% 이상 시민 주도로 이뤄진다”며 “방문객은 강릉시민이 60%, 외지 관광객이 40%”라고 설명했다. 어쩌면 지역 축제야말로 이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강릉 야행은 오는 9월 27~28일 한 차례 더 진행된다.
 
선선한 밤공기 쐬며 은은한 ‘양탕국’ 한 잔?
수원 문화재 야행의 하이라이트인 미디어 아트. [사진 문화재청]

수원 문화재 야행의 하이라이트인 미디어 아트. [사진 문화재청]

올해 문화재 야행을 개최하는 27개 도시 중 21곳이 8·9월에 야행을 개최한다. 무더위를 피해 선선한 밤에 문화재를 즐기기에 지금만큼 좋은 때가 없다. 문화재청이 추천한 8·9월 야행 5개를 소개한다.
 
수원에서는 이달 9~11일 화성 행궁 일원에서 야행이 진행된다. 수원 야행은 2018년 문화재청 우수사업으로 선정됐다. 조선 후기 정조 시대를 주제로 한 행진, 궁궐 벽면을 화면 삼아 펼쳐지는 미디어아트가 하이라이트다. 여느 지역보다 지역 주민과 상인, 예술가가 자발적으로 축제를 준비한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이달 10~11일, 여수 진남관 일원에서도 문화재 야행이 열린다. 전라 좌수영 설치 9주 갑(540년)을 맞아 역사 토크 콘서트를 마련한다. 한국사 강사로 유명한 최태성씨 등이 무대에 선다. 진남관 단청 문양을 활용한 미니 등, 에코백 만들기 체험도 가능하다.
 
군산 야행은 이달 16~18일, 근대역사박물관과 월명동 일원에서 진행된다. 이야기가 있는 유등 조형물이 시내 곳곳에 설치되고 동국사에도 야간경관조명이 걸린다. 풍물·재즈 공연과 학생들의 연극도 놓치기 아깝다.
 
인천 개항장에서 야행을 즐기는 사람들. [사진 문화재청]

인천 개항장에서 야행을 즐기는 사람들. [사진 문화재청]

9월 7~8일에는 인천 중구 개항장에서 야행이 열린다. ‘문화재와 음악을 곁들인 가을밤 마실’이 주제다. 더위가 누그러진 밤, 다채로운 공연을 감상하기 좋다. 문화해설사와 함께하는 주제별 도보 여행 프로그램, 개화기 때 ‘양탕국’으로 불린 커피 체험도 흥미롭다.
 
전주에서는 9월 21~22일 야행이 열린다. 조선 시대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주는 ‘이야기 술사의 버스킹 담화’, 공포 체험 프로그램인 ‘좀비 실록’이 눈길을 끈다.
 
강릉=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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