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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대북정책 리스트에서 실종된 이산상봉

중앙일보 2019.08.09 00:02 종합 24면 지면보기

이산상봉 ‘대북정책 최우선 순위’ 공염불 되나

지난해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금강산 호텔에서 열린 ‘제21차 이산가족 상봉행사’ 마지막 날인 8월 26일 북측 가족들이 버스를 타고 먼저 떠나며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해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금강산 호텔에서 열린 ‘제21차 이산가족 상봉행사’ 마지막 날인 8월 26일 북측 가족들이 버스를 타고 먼저 떠나며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산가족’이 사라졌다. 청와대와 통일부를 비롯한 대북 부처 고위 당국자 입에서 언젠가부터 남북 이산상봉이란 말이 나오지 않고 있다. 추석·설 명절과 함께 상봉 행사의 최적기로 간주해온 8·15가 코앞에 닥쳤지만 깜깜소식이다. 역대 정부가 틈만 나면 강조하던 ‘이산가족 문제는 대북정책의 최우선 과제’란 입장도 옛말이 됐다. 그 자리를 파고든 건 ‘평화’ 코드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과 한반도 평화 어젠더를 부각시키기 위한 이벤트성 행사가 줄을 잇는다. 10일 경기도 파주 지역에서 열리는 비무장지대(DMZ) 평화의 길 개방 행사도 그중 하나다. 후순위로 밀려난 북한 가족과의 만남에 고령 이산가족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이대로 10년 정도 방치되면 사실상 이산가족 1세대가 남아있기 어렵고, 남북 간 이산상봉 이슈도 ‘자연사’ 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일년 한 차례꼴 상봉하다간 540년
고령 이산가족 7만 8000여 명 숨져
식량 주면서도 상봉 얘기는 못 꺼내
실향민 절박함 8·15 축사에 담겨야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수밖에 없다. 지난해 4월 남북 정상회담은 북에 가족을 두고 온 실향민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을 만남의 장으로 택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의기투합했다. 남북 간 교류와 협력을 재개하고, 한반도 분단 구조를 허물기 위한 ‘역사적’ 합의에 이르렀다. 평양에서 공수된 냉면과 도보다리 독대는 앞서 2000년과 2007년 치러진 정상회담 때와 차원이 다른 논의가 가능했음을 짐작게 했다. 남북 정상 간 합의 사항이 담긴 4·27 판문점 선언엔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도 포함됐다.
 
넉 달 뒤 ‘8·15 계기’란 부제를 붙여 금강산에서 연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그 실행이다. 물론 상봉장에 앉기까지 험난한 과정이 있었다. 2016년 4월 중국 닝보우 북한식당에서 일하다 탈북·망명한 12명의 여종업원 문제가 부담이었다. 북한이 이를 우리 정부의 ‘북한 공민 유인 납치’로 규정해 대대적인 대남 비난 공세를 펼쳤고, 국내 일부 세력이 여기에 맞장구치면서 먹구름이 몰려왔다. 상봉 일주일 전 열린 판문점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북측 단장인 이선권 조평통위원장은 이 문제를 염두에 둔 듯 “일정에 오른 모든 문제들이 난항을 겪을 수 있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도발은 없었고 8월 20일부터 상봉이 이뤄졌다. 2015년 10월 제20차 상봉행사 이후 2년 10개월 만의 일이다.
  
‘상봉 확대’ 정부 공언과 달라
 
하지만 그뿐이었다. 지난해 9월 평양에서 문 대통령과 김정은이 3차 정상회담을 하고 군사합의와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재개 같은 굵직한 사안에 서명했지만 이산상봉은 더 이상 열리지 못했다. 추석과 설 명절에 이어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지나 8·15 광복절을 앞두고 있지만 정부의 목소리나 대북제안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남북관계에서 ‘인도주의 협력’이란 차원에서 관행처럼 이뤄져 온 대북지원과 이산상봉의 맞바꿈도 챙기지 않는 상황이다. 정부는 북한에 대한 5만t 규모의 쌀 지원을 추진하면서 이산상봉 문제를 아예 꺼내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대통령과 정부 대북 부처가 공언했던 것과 큰 차이가 난다. 지난해 8월 이산상봉 당일 문 대통령은 “정기적 상봉행사는 물론 전면적인 생사확인과 화상상봉·상시상봉·서신교환·고향방문 등 상봉 확대 방안을 실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의 상시 운영 필요성도 언급했다. 통일부도 대통령 발언 이튿날 국회 상임위 보고에서 “적십자 회담 등을 통해 전면적 생사확인과 고향방문, 상봉 정례화 등을 북측과 본격 협의하겠다”고 강조했다.
 
지금처럼 하다간 이산상봉에 500년 넘게 걸릴 것이란 탄식이 나온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직후 8·15 상봉을 시작으로 모두 21차례 상봉에 그쳤기 때문이다. 정부와 대한적십자사에 북한의 가족과 만나고 싶다고 신청서를 낸 실향민은 제도 시행을 시작한 1988년 이후 13만 3306명이다. 이 가운데 59%인 7만 8903명이 이산의 한을 풀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생존자 5만 4403명이 일 년에 한 차례꼴로 찔끔찔끔 이뤄지는 상봉행사(회당 100명 선발)를 한다면 544년이 필요할 것이란 계산이다. 안타까운 건 90세 이상 1만 2870명을 포함해 80세 이상 고령 이산가족이 64%를 넘는다는 점이다. 지난 한 해 사망한 상봉 신청자는 4914명으로 해마다 그 숫자가 느는 추세다.
  
실향민의 고향 성묘는 인도적 권리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북한 가족의 불이익(월남자 가족으로 낙인) 을 우려해 상봉 신청을 하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는 지적도 있다. 남북이 분단된 1948년부터 6·25 전쟁 발발까지 북한 공산 체제를 탈출한 경우가 약 350만 명, 전쟁 중 월남자 150만 명을 합치면 500만 명에 이르고 동반 가족 등을 고려할 때 실향민 숫자가 1000만 명 수준일 것이란 추산이다. 통일부 등록 사단법인으로 1982년 출범한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는 80세 이상 실향민의 고향 성묘를 남북 당국이 최우선으로 협의해 줄 것을 요구하는 등 고령 이산가족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장만순 위원장은 “올 추석(9월 13일)을 계기로 2박 3일 일정으로 개성 출신 80세 이상 실향민의 성묘 방문단 방북을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산가족의 고향 성묘는 유엔 ‘실향민 처리 지침’에도 올라있는 인도적 권리라는 설명이다.
 
세계인권선언은 “가족은 사회의 자연적이며 기초적인 구성단위며 사회와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16조 3항)라고 명시하고 있다. 또 국제인도법과 국제인권법도 ‘가족의 소식을 알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정치·군사적 분단을 이유로 한 세대가 훌쩍 넘도록 가족·친지의 만남을 가로막고 인도적 상봉을 시혜성 조치나 대남 지렛대로 여기는 경우는 북한 정권이 거의 유일하다.
 
동독의 경우 1952년 탈출자에 대한 사살 명령을 내렸고, 9년 뒤엔 베를린 장벽을 쌓았지만 연금수령인(정년퇴직·산재·장애)에 한해 연간 4주간 서독의 가족·친지를 방문할 수 있게 허용했다. 1964년 제도 시행부터 71년까지 매년 100만명 이상이 방문했고, 1972년 동·서독 관계 정상화 이후에는 결혼·출산·조문 등을 위한 서독 방문이 허용돼 1980년에는 연간 150만명이 서독을 다녀갔다. 서독 정부는 모든 방문객에 환영금과 여비·의료지원을 제공했다. 그 결과 1989년 장벽 붕괴 시까지 동독인의 3분의 1이 서독을 방문하게 됐고, 통일 독일을 이루는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다.
  
한반도 평화라는 거대 담론에 밀려나
 
남북 이산가족 문제와 관련해 국제적십자사는 ①흩어진 가족의 생사와 주소 확인 ②서신 교환 ③상호 방문 ④재결합 ⑤부수적으로 해결할 인도적 문제 등 단계적 해법을 제기하고 있다. 갈 길은 멀고 상황은 절박해지고 있는데 우리 정부의 이산가족 문제 해결 의지는 점차 약해지는 듯하다. 북한의 눈치를 너무 본다는 지적도 실향민 사회 안팎에서 나온다. 남북 간 당국 대화나 협력사업이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라는 거대 담론에 쏠리면서 이산상봉에 대한 집중력을 잃고 있다는 목소리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1절 경축사에서 “이산가족과 실향민이 단순한 상봉을 넘어, 고향을 방문하고 가족·친지를 만날 수 있도록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추진’이나 ‘검토’ 수준의 메시지만으로는 부족하다. 북한에 두고 온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를 70년 세월 만나지 못하고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이산가족의 간절함에 비춰보면 더욱 그렇다. 6·25 피난선을 타고 온 실향민의 후손인 대통령에 대한 실향민의 기대는 클 수밖에 없다. 오는 8·15 경축사에는 이산가족 문제의 절박성이 반영된 해법이 담겨야 한다. 문 대통령이 직접 김정은 위원장에게 촉구하는 수준이 필요하다.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도 중요하지만 ‘죽기 전에 가족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청원에도 남북 정상은 대답할 의무가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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