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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물 뒤지고서야 알았다, '그놈'이 옆집에 산다는 것을

중앙일보 2019.08.08 00:03 종합 8면 지면보기
지난달 초 서울 강남구의 한 원룸에 사는 직장인 양모(29·여)씨는 새벽에 울린 도어록(전자식 문 잠금장치)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누군가 문밖에서 번호를 누르는 소리였다.
 

구멍 뚫린 성범죄자 신상공개

미성년자 있는 집만 상세 제공
1인 가구 여성 “같은 건물 사네”
우편함 뒤져 호수 알아내기도

출소자 사회적응 어려움 우려
“흉악범 따로 분류, 구체 공개를”

“삑삑 삑삑.”
 
찾아오겠다는 사람도 없었던 시간, 수차례 번호를 바꿔 누르는 듯한 삑삑 소리는 몇 분 동안 멈추지 않았다. 겁에 질려 한숨도 못 잔 양씨는 날이 밝자마자 성범죄자의 거주지를 볼 수 있는 ‘성범죄자 알림e’ 앱을 확인했다. 찾아보니 양씨가 사는 건물에 강간 전과 2범인 남성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남성이 사는 층이나 호수는 알 수 없었다. 불안해진 양씨는 입주자들의 우편물에 있는 이름을 보고서야 같은층 바로 옆집에 그 남성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양씨는 즉각 집을 옮겼다. 이곳으로 이사온 지 3개월 만이다. 양씨는 “이사오면서 성범죄자 알림e로 확인했을 땐 건물에 성범죄 전력자가 없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이사온 지 한 달 뒤에 그 남자가 왔다고 한다”며 “알림e 앱의 정보 제공 기능이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다”고 말했다.
  

“같은 동네인 것만 알고 사니 더 불안”

성범죄자 신상정보 고지 문제점.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성범죄자 신상정보 고지 문제점.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성범죄 전력자의 주거지 정보를 공개해 시민들의 불안감을 낮추기 위해 도입된 신상공개 제도가 미흡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현재는 아동·청소년보호법 시행령에 따라 성범죄자의 주소를 건물번호(번지수)까지만 공개하고 있다.
 
하지만 양씨처럼 성범죄자가 어느 건물에 사는지만 알 뿐 동이나 층·호수는 알 수 없다. 성범죄자가 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어느 아파트 단지인지만 표시돼 몇 동인지부터 알 수 없다.
 
그래서 모호한 주소 공개가 오히려 불안감을 키운다는 불만이 나온다. 직장인 이모(27)씨는 “성범죄자가 같은 건물에 살고 있다는 것만 알려주면 다른 층인지, 바로 옆집인지도 알 수 없어서 더 불안하다”면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건물 내의 모든 집을 경계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양씨처럼 성범죄자의 주소를 직접 확인하려는 사람들은 우편함을 뒤지거나 택배 상자를 엿보기도 한다. 양씨는 “성범죄자가 한 건물에 산다는 사실을 알고 관리실도 찾아가 봤지만 알려주지 않았다”며 “다른 주민들에겐 미안하지만 나 역시 불안한 마음 때문에 우편함을 다 찾아보게 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성범죄자의 상세 주소 공개는 예외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예를 들어 A씨 집에 미성년자가 살고 있다면, 이 집이 속한 읍·면·동에 살고 있는 성범죄자의 상세한 주소는 A씨에게 우편으로 통보된다. 성범죄자가 A씨 동네에 새로 이사와도 A씨는 우편으로 그 사람의 정확한 주소를 안내받을 수 있다. 어린이 대상 성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예외 조치다.
 
하지만 성인 여성은 혼자 살고 있다 해도 이런 정보를 얻을 수 없다. 통계청은 현재 여성 1인 가구 수를 291만4000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국 가구 중 14.6%에 해당한다.  
 
5월 한 남성이 여성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한 ‘신림동 CCTV’ 사건을 비롯해 혼자 사는 여성을 노린 범죄가 기승을 부리면서 여성 1인 가구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대학생 김모(23)씨는 “혼자 사는 여성에 대한 범죄 소식이 끊이지 않아 불안하다”면서 “범죄에 취약한 1인 가구에도 성범죄자 신상정보를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혼자 사는 여성에게도 신상공개 추진

지난 5월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30대 남성이 여성을 뒤따라가다가 집에 들어가려 한 모습. 남성을 붙잡은 경찰은 강간 미수 혐의를 적용했다. [트위터 영상 캡처]

지난 5월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30대 남성이 여성을 뒤따라가다가 집에 들어가려 한 모습. 남성을 붙잡은 경찰은 강간 미수 혐의를 적용했다. [트위터 영상 캡처]

 
성범죄자 거주 정보 공개를 꺼리는 명분은 부작용에 대한 우려다. 2013년까지 읍·면·동까지만 공개됐던 성범죄자의 주소는 이후 법이 개정되면서 건물번호까지 공개 범위가 넓어졌다. 당시 일각에서는 “지나치게 많은 정보가 공개되면 출소자의 사회 적응이 어려워져 재범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이 때문에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성범죄자 주소 정보가 공개되고 있다.
 
이에 재범 가능성이 높거나 죄가 무거운 성범죄자를 따로 분류해 이들에 대한 주소 정보만큼은 구체적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방안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제기된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현행 성범죄자 신상공개 제도는 전달 방법도 소극적이고 내용도 제한돼 있어 어정쩡한 상황”이라면서 “제도의 도입 취지를 고려해 공개 범위나 고지 방법을 보다 적극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도 개정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8일 김경협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여성 1인 가구에도 성범죄자 신상정보를 제공하도록 하는 아동·청소년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김 의원은 “여성 1인 가구가 날로 늘어나고 있고, 신림동 CCTV 사건과 같은 성범죄 피해도 늘고 있다”면서 “성범죄자에 대한 정보를 여성 1인 가구에도 제공해 성범죄를 미리 예방해야 한다”고 밝혔다.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개정안이 발의된 뒤 법무부 등 관계부처의 입장을 조율하고 있다”며 “아직까지 구체적인 의견을 정하진 않았지만 국회 논의 단계에서 정부 입장도 곧 밝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궁민 기자 namg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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