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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성한 의약품 안전망, 제2 가습기 살균제 사건 터지나

중앙일보 2019.08.07 13:00

[더,오래] 임종한의 디톡스(28) 

전 세계에서 1만2000여명의 기형아를 태어나게 한 사상 최악의 약물 피해 사건인 독일 탈리도마이드 스캔들 이후 의약품에 대해선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을 의무화하는 등 2중 3중의 안전장치가 마련됐다. [중앙포토]

전 세계에서 1만2000여명의 기형아를 태어나게 한 사상 최악의 약물 피해 사건인 독일 탈리도마이드 스캔들 이후 의약품에 대해선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을 의무화하는 등 2중 3중의 안전장치가 마련됐다. [중앙포토]

 
탈리도마이드. 1957년 10월 1일 독일 그뤼넨탈사에서 처음 출시했으며, 의사의 처방 없이도 살 수 있는 일종의 진통진정제로 임산부의 입덧 방지에도 사용됐다.
 
회사는 광고할 때 ‘무독성’을 전면에 내세웠는데, 이 약이 발매된 다음 해부터 팔과 다리가 없거나 짧은 기형아가 태어났다. 유럽과 아프리카, 일본을 포함해 40여개 국가에서 사용된 가운데 1만 2000여명 이상의 기형아가 태어났다. 현대 의학사상 최악의 약물 피해 사건이다.
 

탈리도마이드 발매후 팔 다리없는 기형아 출산 

반면 미국에서는 단 17건의 부작용 사례만 보고됐다. 당시 FDA 심사관이었던 프랜시스 켈시가 끝까지 판매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켈시 심사관은 서류 미비, 자체 실험자료 미비,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 검토의 불충분 등을 이유로 제약회사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승인요구를 모두 거부했다.
 
덕분에 미국에서 탈리도마이드로 인한 피해를 피할 수 있었고, 프랜시스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다. 원칙을 지킨 공직자의 노력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주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다.
 
탈리도마이드는 판매 초기부터 부작용에 대한 논란이 지속됐지만, 판매는 계속됐다. 동물실험에서 개, 고양이, 닭, 래트, 햄스터, 토끼 등 실험동물에서 어떠한 독성도 보이지 않았다. 한때 부작용이 없는 ‘기적의 약’으로 불린 탈리도마이드 피해 사건의 여파로 동물실험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자주 제기되고 있다.
 
탈리도마이드 분자는 두 광학 이성질체의 형태를 가진다. 이중 한쪽이 입덧 진정 작용을 보이며, 나머지 하나는 혈관의 생성을 억제하는 부작용이 있다. 이 이성질체를 분리 구분한다 해도 한 이성질체가 체내에서 다른 이성질체로 전환되기에 피해를 막을 수는 없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을 두고 한국판 탈리도마이드 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중앙포토]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을 두고 한국판 탈리도마이드 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중앙포토]

 
이 물질과는 관련이 없지만 사건 양태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을 한국판 탈리도마이드 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탈리도마이드 사건 이후 약품의 경우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을 거쳐야 하는 등 의약품의 안전관리가 크게 강화되었다. 놀랍게도 탈리도마이드 피해가 거의 없었던 미국에서 의약품의 안전관리 강화를 주도하며, 의료품의 안전성 평가체계를 새롭게 정립했다. 현재는 신규 의약품을 인정받으려면 임상 1상, 2상, 3상 등 수년이 소용되는 엄격한 임상시험을 거쳐야 한다.
 
의약품은 이러한 안전관리체계 강화를 거쳤지만, 유사한 생활용품 화학물질에 의한 피해인 가습기 살균제의 경우 사람의 화학물질 피해에 대한 안전관리체계가 강화돼야 함에도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 제정,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개정 등으로 많은 진전이 이뤄졌지만 화학물질의 인체 피해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에선 아직 달라진 것이 없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사망자 접수만 1400여건이 넘었는데, 화학물질의 인체 피해 모니터링에 달라진 것이 없다니 놀라운 일이다. 탈리도마이드 사건 이후 미국은 피해가 경미했음에도 의약품의 안전관리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혁한 것에 비해 너무 비교되는 일이다.
 
화학물질의 안전성은 빠른 파악이 중요하다. 짧은 기간 안에 등록 및 평가가 이루어지기 어렵다면 감시체계를 구축해 화학물질로 인한 피해를 모니터링해야 한다. [사진 GS]

화학물질의 안전성은 빠른 파악이 중요하다. 짧은 기간 안에 등록 및 평가가 이루어지기 어렵다면 감시체계를 구축해 화학물질로 인한 피해를 모니터링해야 한다. [사진 GS]

 
안전하지 않은 제품이나 화학물질은 시장에서 빨리 퇴출당해야 한다. 빠른 기간 안에 모든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가 이루어지면 좋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감시체계를 구축해 화학물질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는지 철저히 모니터링해야 한다. 독성물질감시센터(Poison Control Center, PCC)를 설치해 시민들이 유해 화학물질에 노출되어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닌지 세심한 모니터링을 하는 안전장치를 둬야 한다.
 

유해물질 공개 꺼리는 외국 의약품 제조사들  

1940~1950년 사이 선진국들은 화학물질 감시체계를 만들어 화학물질의 사고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우리나라는 세계 7위의 화학산업국가로 성장했지만, 시민들에게 응급처치 정보를 제공할 그 흔한 독성물질감시센터도 없다. 시민의 건강에 위협을 줄 가능성이 높아 엄격히 감시해야 할 바이오사이드 물질도 선진국보단 관리가 허술하다.
 
왜 외국기업이 자국에선 엄격히 안전관리 규정을 지키다가 한국에선 같은 제품을 팔면서 제품 속에 들어 있는 유해물질의 성분이나 함유량은 전혀 공개하지 않고, 소비자 보호 규정도 잘 지키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화학물질 피해를 예방하는 법제가 엉성하기 때문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반복되지 않게 탈리도마이드 사건이 주는 교훈을 우리 사회가 잘 새겨야 한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국민의 건강을 보호할 수 있게 촘촘한 안전망을 짜야 한다.
 
임종한 인하대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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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한 임종한 인하대 의과대학 교수 필진

[임종한의 디톡스] 브레이크 없이 진행되는 산업화, 문명화는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바꿔놓기는 했지만 그만큼 혹독한 대가를 요구한다. 우리는 실생활 속에서 다양한 유해성분과 독소에 노출되고 있다. 우리 몸의 독소를 줄이거나 제거할 수 있는 방법에는 뭐가 있을까. 건강한 일상, 삶의 질 향상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일상 속에서 실천 가능한 디톡스(Detox, 해독) 이야기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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