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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의 시시각각] 일본의 안보상 가치 잊었는가

중앙일보 2019.08.06 00:15 종합 30면 지면보기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일본과의 안보 협력은 깨도 되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폐지 논란이 커지면서 일본의 안보상 가치가 저울 위에 올랐다. 한쪽에선 때때로 쓸만한 위성 정보를 주는 나라 정도로 여기는 모양이다. 이는 보이지 않은 일본의 안보적 중요성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일본, 주한미군 철수 저지하기도
극대화된 북한 위협 감안한다면
최소한의 안보협력은 유지해야

잘 안 알려져서 그렇지 일본은 여러 번 한국의 안보에 큰 도움을 줬다. 1970년대 초 중국과의 데탕트를 원했던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마오쩌둥 정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한국 내 유엔사령부를 없애겠다고 선언했다. 유엔사가 사라질 경우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던 미군의 한반도 주둔 명분은 크게 약화한다. 북한이 비동맹국가를 등에 업고 유엔사 해체를 위해 맹렬히 뛴 것도 이 때문이다. 이때 한국을 도와 유엔사 해체를 막은 게 일본이다. 1973년 유엔 총회에서 일본 대표는 이렇게 역설한다. “정전체제 유지에 관한 관련국 간 사전합의가 없는 한 일방적 유엔사 해체는 한반도 평화를 위협한다”고. 한국 주장 그대로였다.
 
1970년대 말 지미 카터 대통령이 주한미군을 모두 빼려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1977년 1월 월터 먼데일 부통령이 일본에 와 주한미군 철수 방침을 알리자 자민당 의원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반대 청원까지 냈다. 2개월 후 미·일 정상회담차 워싱턴에 간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총리는 “‘철수’ 대신 ‘감축’으로 가야 한다”고 카터를 설득했다. 이 무렵 터진 코리언 게이트로 박정희 정권은 입도 뻥끗 못 할 처지였다. 결국 전면 철수를 고집했던 카터는 감축으로 돈다. 미 행정부 내 반대 탓도 컸지만, 일본의 로비가 한몫했다는 게 정설이다.
 
일본이 한국 편을 든 건 물론 자국의 이익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기야 어떻든 두 나라의 안보상 이해가 맞아떨어져 이렇듯 협력한 때는 적지 않았다. 특히 아시아 동맹국을 지켜주겠다는 미국의 안보 약속이 불안해질수록 한·일은 밀고 끌었다. 불행히도 바로 지금이 딱 그런 때다.
 
지금 한국은 한·일 전면전에 매몰돼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두 가지 큰 변화를 외면하고 있다. 우선 북한의 위협이 1년 전과는 비할 수 없게 커졌다. 북한은 지난달 23일 3000t 이상으로 보이는 잠수함을 공개했다.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3기를 너끈히 실을 크기다. 이 추정이 맞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북한이 잠수함으로 몰래 접근해 미 본토를 핵 탑재 SLBM으로 때릴 수 있는 까닭이다. 이럴 경우 미국이 뉴욕·LA에 북핵이 떨어질 걸 각오하고 우리를 지켜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지난 5월 이후 북한이 연달아 쏴 올린 발사체는 모두 최대 사거리가 600㎞ 안팎이었다. 죄다 일본도 못 닿을 단거리 미사일, 또는 신형 방사포였다. 그렇다면 이들 무기는 누굴 겨냥해 개발됐다는 말인가.  
 
한국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미국의 약속이 갈수록 미덥지 않다는 것도 중대한 변화다. 2년 전 북핵 위협으로 국내에서 핵무장론이 힘을 얻자 미 행정부는 ‘확장억제 전략’을 내세우며 한국을 다독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미국은 이 전략의 실체가 뭔지도 알려주지 않고 있다. 내용을 물으면 그저 “북한 도발 시 북녘땅을 주차장으로 만들겠다”는 말만 되풀이한다고 한다. 매년 열기로 했던 고위급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마저 지난해 1월 이후 무소식이다.
 
한·일 간 갈등이 악화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터무니없는 미국의 방위분담금 인상 요구에 공동 대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아베 정부는 서로 돕기는커녕, 한·미·일 3각 안보협력에서 한국을 빼려는 분위기다. 옛 안보 파트너의 소중함을 무시한 데 따른 후유증이다. 그러니 사태가 더 나빠지지 않게 최소한의 안보 협력 관계라도 유지해야 한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생존을 위해 손을 맞잡았던 한·일 간 안보 협력의 기억을 끌어내 되새겨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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