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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자, 앙리 루소의 정글로

중앙일보 2019.08.04 09:00

[더,오래] 박보미의 아트 프리즘(4)

휴가지에서 눈 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순간에도 계속 피곤하다면 '탈진 증후군'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의욕적으로 일하던 사람이 느끼는 '마음의 탈진상태'이다. [사진 pxhere]

휴가지에서 눈 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순간에도 계속 피곤하다면 '탈진 증후군'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의욕적으로 일하던 사람이 느끼는 '마음의 탈진상태'이다. [사진 pxhere]

 
푸른 바다에 하얀 파도, 한적한 백사장에 초록색 야자수. 그 아래 느긋하게 놓인 해변용 의자. 수많은 시각 매체 주입의 학습결과로 ‘여름휴가’ 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장면이다. 여기다 알록달록한 칵테일 한 잔 있으면 완벽하겠지.
 
열심히 돈을 모아 이런 휴가를 간 적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막상 눈앞에 꿈꾸던 바다가 펼쳐져 있는데 정작 쉴(休·휴) 틈(暇·가)이 느껴지지 않는다! 원하던 장소에 왔는데. 비싼 호텔에 누웠는데, 야자수 아래 모히또 한 잔을 마시며 누워 있는데도 뭔가 계속 피곤하다.
 
이는 탈진 증후군(Burnout syndrome) 때문이란다. ‘번 아웃 신드롬’, 탈진 증후군은 의욕적으로 일하던 사람이 신체적·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면서 무기력해지는 현상이다. 더 쉽게는 ‘마음의 탈진상태’라고도 한다.
 
멍하니 있을 때나 특별히 집중해서 하는 일이 없을 때도 우리의 뇌 일부는 일종의 ‘공회전’을 계속한다. 그런데 이 에너지 소비량이 상당하다. 뇌과학자에 따르면, 뇌가 소비하는 에너지의 60~80%가 바로 이 ‘공회전’으로 인해서 발생한다. 하루에 신체가 쓰는 에너지의 20%를 뇌가 소모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누워있어도 뇌는 계속 돌아가니 피곤할 수밖에.
 
그렇다면 잡념 많은 타입인 나는 진짜 ‘쉴 틈(휴가)’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인가. 왠지 서글픈 기분으로 카페에 걸린 포스터를 무심히 보았다. 벽에 걸린 아크릴 액자 속에는 앙리 루소의 1909년 작품 ‘열대우림’이 인쇄되어있다. 

 
1909년 앙리 루소의 작품 '열대우림' Oil on canvas 1909 National Gallery of Art. [사진 Wikimedia Commons]

1909년 앙리 루소의 작품 '열대우림' Oil on canvas 1909 National Gallery of Art. [사진 Wikimedia Commons]

 
루소의 그림엔 늘 야생의 생명력이 넘친다. 시원시원하게 뻗은 줄기들과 시든 잎 하나 없는 큼직한 잎사귀, 처음 보는 열대나무들이 활짝 편 부채처럼 자신만만하게 화면에 자리하고 있다. 프린트 된 것이지만, 거침없는 붓자국들과 다채로운 초록과 원색의 배색, 그 뒤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가 어우러진다.
 
이는 가벼운 포스터의 느낌을 상쇄할 만큼 회화의 힘을 간직하고 있다. 아무리 마음이 지쳐있는 사람이라도 루소의 그림을 보면 순간적이나마 자신이 열대우림 앞에 서 있고, 이름 모를 풀벌레와 동물의 인기척이 들리는, 뺨을 간질이는 더운 바람을 어렵잖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딱 봐도 형태가 사실적이지는 않다. 아카데믹한 기술적 측면에서 보자면 재능(?)있는 초보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겠다. 비례나 자세, 사실적 형태, 원근법 따위는 가뿐히 무시되었다. 그래서 비현실적이다. 그런데 동시에 무척 아름답고도 생생하다. 몰라서 그렇지 찾아보면 틀림없이 이런 풍경이 지구상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은 마성의 설득력이 있다.
 
루소의 작품은 실제 세상보다는 우리가 꿈꾸는 판타지에 더 가깝다. 실제로 식물학자에게 물어봤더니 루소의 그림 속에 나오는 나무 중에 실제랑 비슷한 것은 하나도 없단다. 그러나 뭐 어때. 어차피 작품을 보는 사람의 뇌도 세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처지다.
 
 '꿈', Oil on canvas 1910 Museum of Modern Art. [사진 Wikimedia Commons]

'꿈', Oil on canvas 1910 Museum of Modern Art. [사진 Wikimedia Commons]

 
일반적으로 풍경화은 인물화보다 보는 사람을 느긋하게 한다. 더구나 초록과 원시우림의 풍경, 아름다운 색채를 지닌 작품 속으로 맘 편히 빠져들 법하다. 그런데 묘하게도 마냥 편안하지 않다.
 
왜일까?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시선이 느껴진다. 풀숲에 숨겨진 눈동자를 발견하고 조금 놀라게 된다. 보는 이는 풍경을 응시하는 주도권을 가진다고 생각하지만 곧바로 야생의, 길들여지지 않았고 생각을 알 수 없는 어떤 존재들에 의해 내가 관찰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루소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눈동자는 때론 사자, 호랑이, 뱀, 원숭이일 때도 있고 여인이거나 목동일 때도 있다. 그 눈빛은 감정을 짐작할 수 없지만 화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정확히 정면을 바라보는 그 눈.
 
우리는 몽환적인 야생의, 꿈같은 정경에 빠져들고 싶지만 그 찜찜한 눈빛, 꿰뚫어보는 듯 한 시선에 의해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그림을 보는 중에 되풀이되는 이 과정은 의식에 겹겹의 층을 드리우며 2차원 평면을 넘어선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뱀을 부리는 여인' Oil on canvas 1907 Musee d’Orsay. [사진 Wikimedia Commons]

'뱀을 부리는 여인' Oil on canvas 1907 Musee d’Orsay. [사진 Wikimedia Commons]

 
나는 작품 속 나무들이 가르키는 방향을 따라 샅샅이 훑어보며 자연스럽게 그림이 뿜어내는 색채와 형태와 미지의 동물들에 집중했다. 그때 나는 드디어 머릿속 잡념의 공회전을 멈췄다. 단순한 전환이지만 뇌의 휴식은 의식이 현재에 집중할 때 가능하다니 말이다. 무의식적으로 자꾸만 과거 또는 미래를 생각하면 머리는 쉽게 지친다고 한다. 주의가 산만해지고, 무기력감에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나면 당신은 뇌가 지친 거다.
 
때론 속칭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을 줄여서 부르는 말)’을 무기 삼을 필요도 있겠다. 평생 뻔뻔할 정도로 당당했던 루소처럼 말이다. 물론 자신감이 막연히 생기는 건 아니다. 하지만 타당한(?) 걱정을 뻔뻔하게 무시하고 지금 내가 하는 행동에 세밀하게 집중하다 보면 그동안 충분히 쉰 뇌가 의외의 창의력과 기특한 생각을 떠올리게 하며, 그것이 결국 자존감을 쌓을 테니, 일부러라도 해 볼 만하다.
 
참, 앙리 루소는 일평생 단 한 번도 아프리카나 정글을 가보지 못했다. 그는 생계를 위해 25년간 세관원으로 일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주말에만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서 ‘일요일의 화가’라고 불렸을 정도다. 말년에 피카소가 강한 확신으로 인정하고 격려해주기 전까지는 평생 아마추어 화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평생 개인전 한 번 못했다.
 
그래도 남들이 비웃든 말든 자기 스타일대로 살았다. 근처 파리 식물원에서 이국적인 식물을 관찰하고 스케치했다. 이건 어디서 많이 본 삶 아니던가. 우리도 생계를 위해 일주일 내내 일을 하고, 주말에 겨우 시간을 내 좋아하는 것을 찾으며 삶을 견뎌내고 있으니까.
 
루소가 만약 돈이 없어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고 먹을 것을 걱정하는 자신의 삶을 자조하고 걱정만 했다면, 지금 우리는 그의 유토피아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매일매일 노트에 꿈을 기록하고 열심히 스케치하며 현재에 집중하는 행위는 오히려 그의 가능성을, 재능을 더 자유롭게 분출하도록 도와주었다. 루소에게 그림 그리기는 일요일마다 주어지는 휴식이자 내밀한 고백, 치유이자 휴가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가 동네 식물원·동물원을 관찰하고 만들어낸 작품들은 이후 초현실주의 화가·시인에게,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잠자는 집시' Oil on canvas 1897 Museum of Modern Art. [사진 Wikimedia Commons]

'잠자는 집시' Oil on canvas 1897 Museum of Modern Art. [사진 Wikimedia Commons]

 
인정받지 못해 외롭고, 항상 돈이 없고, 남들에게 존경받을 학위도 없어 지지리 궁상이던 화가 앙리 루소. 그의 삶은 고상하지 않았다. 유혹에 못 이겨 돈과 우표를 좀 훔쳐 수감되기도 했고, 은행 사기에 얽혀 재판도 받고 이런저런 구차한 삶의 바닥을 겪었기에 그의 꿈의 세계는 더욱 황홀했는지도 모르겠다. 삶의 환상과 그늘, 욕망과 죄책감. 그늘 안에 숨은 은밀하게 빛나는 눈빛은 벗어날 수 없는, 어쩌면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이었을지 모른다.
 
여름 휴가철이다. 아무리 비싼 비행기 표를 예약한대도 바닥난 배터리, 멈추지 않는 ‘공회전’ 상태에서는 재충전에 성공할 수가 없다. 단 한 순간이라도 진짜 쉼을 원한다면, 이번 휴가는 루소와 함께 정글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그의 작품을 보러 파리의 미술관을 찾을 필요도 없다. 그냥 구글의 ‘이미지 검색’ 만으로도 그 여행은 충분하다.
 
박보미 아트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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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미 박보미 아트 칼럼니스트 필진

[박보미의 아트 프리즘] 예술은 무엇이고, 미술은 무엇일까? 그게 우리를 어떻게 달라지게 하는 걸까? 시선을 조금만 비틀어도, 모든 것이 예술이 된다. 미술을 전공한 필자가 특별히 미술관을 찾지 않더라도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일상 속 예술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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