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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CCTV속 수상한 車···필리핀 실종 사업가 10년 미스터리

중앙일보 2019.08.04 08:00
10년 전 필리핀서 사라진 전직 조폭출신 환전사업가 정이영(실종 당시 43세)씨 모습. 필리핀 출국 전 한국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가족]

10년 전 필리핀서 사라진 전직 조폭출신 환전사업가 정이영(실종 당시 43세)씨 모습. 필리핀 출국 전 한국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가족]

10년 전 필리핀 현지에서 환전사업가 정이영(당시 43세·사진)씨가 실종됐다. 정씨는 전북 익산시 내 유흥가를 주 무대로 활동했던 조직폭력배 대전사거리파 출신이다. 그는 1988년 서울 강남의 한 이발소에서 행패 부리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허모(당시 30세) 순경을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당시 22세였다. 정씨는 살인죄가 확정돼 15년의 죗값을 치렀다. 출소 후 이런저런 사업을 벌였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큰누나에게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겠다”며 필리핀에 정착했다. 조카 여러 명을 불러 관광을 시켜줄 정도로 환전사업이 자리 잡았을 때 갑자기 사라졌다.
 

정씨 앞 정차해 있던 수상한 승합차 

정씨 큰누나와 자신을 익산 삼남백화점파 부두목 출신이라고 밝힌 오모(59)씨 등에 따르면 2009년 1월 정씨는 필리핀 집에서 나온 뒤 전화통화를 하며 길을 걷다 누군가에게 순식간에 납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길을 걷는 정씨의 모습이 폐쇄회로(CC)TV에 잡혔다고 한다. 영상 속에는 정씨 앞으로 승합차가 한 대 서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큰누나는 “CCTV가 촬영되지 않는 곳에서 동생이 승합차에 태워진 것으로 의심된다”고 말했다. 전 조폭 오씨는 정씨 실종으로 ‘이득’을 보게 되는 자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1988년 7월 22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정이영씨 기사. 정씨는 경찰관 살해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다. *공범 실명, 범행장소, 흉기 등은 삭제했습니다. [중앙포토]

1988년 7월 22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정이영씨 기사. 정씨는 경찰관 살해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다. *공범 실명, 범행장소, 흉기 등은 삭제했습니다. [중앙포토]

 

출국 전 금전문제로 윗선과 갈등도 

정씨는 필리핀 생활 전 서울 강남의 한 카지노바(bar)를 자주 다녔다. 그는 어느 날 카지노바 안에서 같은 조직 내 고위 간부의 요구로 어쩔 수 없이 타지역 조폭에 1억8000만원의 도박자금을 빌려줬다고 한다. 출소 후 어렵게 모은 돈이었지만 윗선의 말을 거스를 수 없어 수수료 명목으로 1800만원을 떼고 건넸다. 하지만 돈을 돌려받지 못했고, 이 고위 간부와는 사이가 크게 틀어졌다고 한다. 결국 정씨는 친형에게 돈을 빌린 뒤 한국을 떠났다.
 
당시 한국 조폭들 사이에서 필리핀은 ‘작은 한국’으로 불렸다. 마닐라 등지의 카지노에서 ‘정킷방’(해외 카지노에서 빌린 VIP룸)’이나 ‘롤링업(카지노에 손님을 소개하고 수수료를 받는 일)’, 유흥주점, 성매매 알선 등을 통해 재미를 봤다는 소식이 종종 들렸다. 
 
2013년에는 수십억원의 대출 사기를 저지르고 해외로 도주했던 양은이파 두목 조양은이 검거된 곳이 바로 필리핀이다. 
필리핀 내 범죄 이미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 없습니다. [연합뉴스]

필리핀 내 범죄 이미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 없습니다. [연합뉴스]

 

"조카 배웅 못해 미안해" 마지막 통화 

정씨는 이런 필리핀에서 환전사업을 통해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2남 3녀 중 셋째다. 일찍 부친을 여읜 정씨는 출소 후 가족 등을 살뜰히 챙겼다고 한다. 10년 전 필리핀으로 놀러 온 조카들이 한국으로 되돌아갈 때 공항으로 배웅 가지 못했다. 대신 같이 일하는 동생에게 공항 배웅을 부탁했다. 정씨는 마음에 걸렸던지 큰누나에게 “몸이 안 좋아 공항에 함께 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마지막 통화였다.
 
정씨 큰누나는 “10년이 지났는데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있다. 실종 당시 경찰에 신고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며 “필리핀은 휴대전화 위치추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수사여건이 열악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더라. 너무 보고 싶다”고 울먹였다. 
 

"누군가의 사주로 납치된 것" 의심 

오씨는 누군가의 사주로 정씨가 현지에서 납치됐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그는 “이영이가 총에 맞아 숨졌다는 말도 있고, 쇠사슬에 묶여 어딘가에 감금돼 있다는 끔찍한 이야기도 전해진다”며 “현지 교민들 사이에서 ‘브루스 리(李)’로 통하는 조폭이 연루돼 있을 것이라는 소문도 퍼져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 정씨 ‘처리 대가로 3000만원을 받았다’ 등의 구체적인 금액 이야기도 떠돈다는 게 오씨 주장이다. 
 
정씨가 사라진 그해 5월 필리핀 내 한국인 교민 소식을 전하는 인터넷사이트에는 브루스 리 후배들이 교민을 무차별 폭행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오씨는 “이영이는 내 친동생이나 다름 없다”며 “이제라도 수사가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 혹시 잘못됐으면 한이라도 풀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정이영씨가 필리핀 실종자 명단에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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