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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전셋집 경매 넘어가도 안 알려주는 법원…“외국인 세입자 위한 규정 없다”

중앙일보 2019.08.03 11:00

보증금 5000만원 못 받고 쫓겨나게 된 사연은?

2012년부터 한국에 사는 중국인 이화(31)는 최근 전세로 살고 있던 집에서 나가달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가 사는 원룸 건물이 경매로 넘어가면서 집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전세 건물이 경매에 올라가면 기한 내에 법원에 배당을 신청해야만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 그러나 외국인인 이화는 경매 사실 자체를 듣지 못했다.  
 
그가 서울 신림동 골목에 위치한 원룸에 전세로 입주한 건 2016년 9월이다. 전세보증금 5000만원은 대출을 받아 마련했다. 그는 아직도 그 돈을 갚고 있다. 이화는 지난해 말 갑자기 가스가 끊기자 근처 부동산을 찾았고 거기서 경매 소식을 들었다. 이미 전세보증금에 대한 배당요구 기한이 지난 뒤였다. 이화가 사는 원룸 건물이 법원 경매에 올라간 건 2017년 8월로, 임차인이 배당요구 신청을 할 수 있는 기한은 지난해 3월까지였다.  
중국인 이화(31)가 새 집주인으로부터 받은 안내문. 그는 배당요구 신청을 기한내에 하지 못해 배당금을 수령할 수 없다. [독자 제공]

중국인 이화(31)가 새 집주인으로부터 받은 안내문. 그는 배당요구 신청을 기한내에 하지 못해 배당금을 수령할 수 없다. [독자 제공]

새 건물주는 보증금을 받지 못한 외국인 세입자들에게 나가라는 공문을 보낸 상황이다. 이화의 옆집에 사는 60대 중국인 부부도 경매 사실을 듣지 못해 전세금에 대한 배당요구 시기를 놓쳤다. 내국인 임차인은 일찌감치 법원으로부터 전세보증금에 대한 배당을 요구하라는 통지를 받았지만 외국인 세대주들은 가스가 끊길 때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법원 "외국인 거주 여부 확인 방법 없다" 

3일 법조계에 따르면 법원은 경매를 진행하면서 외국인등록증을 열람할 권한이 없어 경매 건물의 외국인 거주 여부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즉,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전세로 사는 건물이 경매에 넘어갔을 때 이를 알 수 없다는 의미다. 경매를 담당하는 전국의 법원은 주민등록번호가 있는 내국인 임차인에게만 경매 상황을 통지한다. 외국인의 거소신고 내용은 법원에서 조회할 수 없어서다.
 
법적으론 외국인등록을 하고 거소신고를 했다면 주택임대차보호법의 보호 대상이다. 내국인의 주민등록상 전입신고와 외국인의 거소신고가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다. 거소신고는 물론 전입신고까지 해뒀던 이화는 배당 요구만 제때 할 수 있었다면 보증금을 우선 변제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법만 있고 행정절차는 없는 셈이다.

 

현장조사 나간다지만…"사람 없으면 조사 못 해" 

법원은 주민등록법시행규칙에 따라 임차인이 사는 건물이 경매에 올라오면 주민등록을 조회해 우편으로 고지해준다. 그러나 외국인에 대한 법률 규정은 없다. 주민등록 조회만으로는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외국인의 거주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부동산 경매 자료사진. [중앙포토]

부동산 경매 자료사진. [중앙포토]

임차인이 배당을 요구할 수 있는 기간이 끝나기 전에 법원 집행관이 현황조사를 직접 나가긴 한다. 그러나 집행관은 낮 시간대에 주로 방문하기 때문에 직장이 있는 외국인을 만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법원 관계자는 “폐문부재(문이 닫혀있고 사람이 없음) 등의 이유로 누가 거주하는지가 정확히 조사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며 “외국인 거주지 열람을 위한 주민등록법 시행규칙 개정을 법무부에 건의하겠다”고 했다.

 

"외국인 느는데 규정 빨리 정비돼야"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체류 외국인은 230만명이 넘는다. 이 중 외국인 등록과 거소신고를 마친 장기체류 외국인만 168만명에 달한다. 국내 거주 외국인 수는 매년 느는 추세다. 판사 출신의 이현곤 변호사는 “법원은 규정에 따라 주민등록을 조회하고 배당 관련 고지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외국인은 고려되지 않고 있다”고 우려했다.

 
강성신 변호사(법률사무소 해내)는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늘고 있는 만큼 하루빨리 규정이 정비되지 않으면 보증금 피해를 받는 외국인이 계속 늘어날 것이다”며 “현재 상황에서 이화 등의 외국인은 법적 구제 방법이 마땅치 않을 뿐 아니라 헌법소원을 하더라도 이미 침해된 생존권을 보장받기엔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정진호 기자 jeong.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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