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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도 순결 정숙…시대착오 교훈‧교가 이번에는 손질되나

중앙일보 2019.08.03 06:00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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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미추홀구 A여자중학교의 교훈은 '정숙' '검소' '근면'이다. 여기서 '정숙'은 '여자로서 행실이 곧고 마음씨가 맑고 고움'을 뜻하는 단어다. 이 학교의 교목은 향나무인데 학교 홈페이지에선 교목 사진 밑에 '곧은 절개'라는 설명을 붙였다. 절개에는 “신념, 신의를 굽히지 않는다”는 뜻도 있지만 “지조와 정조를 깨끗하게 지키는 여자의 품성”이라는 의미도 있다. A여자중학교의 교가 1절에는 “정숙한 어진 꽃이 향기 머금고”라는 구절도 나온다.
학부모 김모(48·여)씨는 “양성평등을 강조하는 요즘 시대에 정숙과 절개 등을 찾는 건 구시대적인 발상 아니냐”고 반문했다.
 

인천 20여곳 학교 여성역할 등 강조한 교훈·교가

인천 일부 학교의 교훈과 교가가 도마 위에 올랐다. 성 역할을 강요하거나 성차별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표현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특히 여중·여고 등 여학교가 주로 그랬다. 
 
중앙일보가 인천지역 여자중학교 26곳과 여자고등학교 21곳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교훈과 상징물, 교가 등을 분석한 결과 20여곳의 학교에서 여성성 등을 강조하는 내용이 나왔다. 연수구 한 여고 교가에는 '몸과 얼을 아름답게 가다듬어서'라는 구절이 있었다. 부평구의 한 여고는 교가에서 ‘청순하고 예의 바른 사랑의 요람’이라고 학교를 소개했다. 중구에 있는 여고는 “연한 듯 무거움은 정숙의 표상”이라는 가사를 사용했다.
 
중학교도 비슷했다. '정숙'이나 '지혜로운 여자가 되자'를 교훈으로 내세운 학교도 있었다. '착하고 어질게', '미덕을 쌓고', '단아하고 매운 절개', '참되고 굳세게 또 아름답게'를 강조하는 교가도 상당수 확인됐다. 연수구 소재 여자중학교에 다니는 이모(14)양은 “교가에 '정숙의 표상일세'라는 부분이 있는데 '정숙'이 여자의 행실에 대한 단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며 “나쁜 뜻이 아니지만 다른 좋은 내용으로 바꾸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천시교육청 관계자는 “교훈이나 교가 등은 개교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주로 오래된 여학교들의 교가가 논란이 되고 있다”며 “시간이 흐르면서 성 역할도 구분이 없어졌는데 교훈이나 교가는 바뀌지 않고 과거에 머물면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교 자체적으로 교훈·교가 변경도

강화여자고등학교는 학교 구성원의 의견을 수렴해 교가의 일부 구절을 바꿨다. [강화여고 홈페이지 캡쳐]

강화여자고등학교는 학교 구성원의 의견을 수렴해 교가의 일부 구절을 바꿨다. [강화여고 홈페이지 캡쳐]

불만을 표시하는 학생과 교사들의 요구에 따라 일부 학교는 교훈과 교가 등을 바꾸고 있다. 
인천 강화여고가 대표적이다. 강화여고는 1955년 개교 당시부터 불러온 교가의 후렴 중 하나인 '여자다워라'를 2016년 5월 '지혜로워라'로 바꿨다. 학생들이 교가의 가사가 시대착오적이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여자라는 성 역할을 강요한다’는 주장이었다. 학부모 운영위원회와 교사들도 이에 동조했다.
 
학교 측은 그해 ’교가 개사 공모전‘을 열었다. 11명의 학생이 응모했다. “학생다워라, 총명하여라” 등의 표현이 담긴 총 11편의 응모작을 교무부장 등 5명의 교사가 심사했다. 그 결과 “여자다워라”는 문제의 가사를 “지혜로워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입학식에서는 바뀐 교가가 울러 펴졌다.  

강화여고 관계자는 “당시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교가 후렴구를 바꿨다”며 “교정에 있던 표지석에 쓰인 '여자다웁게'라는 글귀도 전교생과 교사 등이 참여한 공모전을 거쳐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ㆍ흐르는 물처럼 서로 앞서려고 다투지 말라)으로 변경했다”고 말했다.
 
이는 인천만의 일이 아니다. 강원도 춘천여고는 지난 4월 '성실·순결·겸양'이던 교훈을 '꿈을 향한 열정, 실천하는 지성'으로 바꿨다. 부산시 사직여중도 최근 '슬기롭고 알뜰한 참여성'이라는 교훈과 교가 가사를 '슬기롭고 따뜻한 참사람'으로 교체했다.
사직여중 관계자는 “지난해 학생회장 후보가 교훈과 교가 가사를 바꾸겠다는 공약을 내걸어 당선된 후 학생회에 안건 발의를 했다”며 “학생, 학부모, 교사를 상대로 사전조사를 한 결과 찬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서 교훈‧교가 가사 변경을 진행하게 됐다”고 밝혔다. 공모를 통해 사직여중의 변경된 교훈과 교가는 지난 15일 학교 운영위원회를 통과했고 오는 2학기부터 공식행사에 등장할 예정이다.
 

인천, 교훈 교가 내 성차별적 요소 전수조사

인천시교육청 전경 [연합뉴스]

인천시교육청 전경 [연합뉴스]

이런 가운데 인천시 교육청이 지역 모든 학교의 교훈과 교가 등에 성차별적 요소가 있는지 등을 전수조사에 나서기로 해 눈길을 끈다. 인천시 교육청은 지난 10일 인천시 초·중·고 524곳에 ‘양성평등 친화적 문화 조성을 위한 교가·교훈 새로 쓰기 사업 계획’ 관련 공문을 보냈다. 8월 말까지 교가·교훈 내 성차별, 성 역할 강요 요소가 있는지를 조사하는 내용이다. 교내 교훈, 교가 속 성차별 요소를 전수조사하는 것은 전국 17개 시도 중 인천시 교육청이 처음이다.
 
이에 지난 12일부터 16일까지 각 학교는 교가·교훈 전문을 시 교육청에 제출했다. 시 교육청은 양성평등정책과 성별영향평가 등을 연구하는 전문가 5명으로 구성된 컨설팅협의회 등을 거쳐 양성평등에 어긋나는 교가나 교훈을 선별하기로 했다. 어떤 내용이 ‘성 평등’에 위배되는 것인지 기준을 정한 뒤 다음 달 16일까지 전문을 검토할 예정이다.
인천시 교육청은 지난 10일 인천시내 학교에 ‘양성평등 친화적 문화 조성을 위한 교가·교훈 새로 쓰기 사업 계획’ 관련 공문을 보내 교훈과 교가 등에 성차별적 요소가 있는지 전수조사에 나섰다.[사진 인천시교육청]

인천시 교육청은 지난 10일 인천시내 학교에 ‘양성평등 친화적 문화 조성을 위한 교가·교훈 새로 쓰기 사업 계획’ 관련 공문을 보내 교훈과 교가 등에 성차별적 요소가 있는지 전수조사에 나섰다.[사진 인천시교육청]

시 교육청은 잘 만든 교훈, 교가는 우수 사례로 공개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은 교훈, 교가는 교사와 학생, 학부모, 동문 등과 상의해 변경 여부를 결정하도록 권장할 계획이다. 이어 오는 2학기에는 학교별로 양성평등 친화적인 교가·교훈 새로 쓰기 주간을 자율적으로 운영하게 할 방침이다. 학교별 특수성을 고려해 자체 공모전, 학생 자치회, 동아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인천시 교육청 관계자는 "양성 평등적인 교가와 교훈은 학생들의 성 인식을 개선할 수 있는 첫걸음"이라며 "학교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구성원 반발로 변경 못 한 학교도

그러나 강제성이 없어 한계가 있지 않겠냐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교육부가 지난 2000년 6월 남녀차별금지법 시행 1주년을 맞아 남녀 차별적 교훈과 교가를 바꿀 것을 권고하는 공문을 각 학교에 보냈다. 당시 교육부는 “성차별적 교훈과 교가를 고수하는 것은 지난해 6월 각급 학교에 시달한 ‘교육에서의 남녀차별 금지를 위한 기준’을 어긴 것이므로 철저히 시정토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상당수 학교가 동문회 등의 반발로 교훈이나 교가를 바꾸지 못했다. 
강원도의 한 여고는 2013년 '참된 일꾼, 착한 딸, 어진 어머니'라는 교훈이 유교적 남성 중심 사회에 기초한 여성상을 뜻한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개정을 추진했다. 학생, 학부모, 교사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됐고 학교 측도 교훈 공모전을 개최하려 했지만, 총동문회가 반대해 무산됐다. 당시 이 학교 재학생이었던 전모(23ㆍ여)씨는 “교훈을 바꾸려는 목소리가 높았는데 총동문회 측에서 반대하면서 진행되지 못해 아쉬웠다”고 말했다.

 
울산시 한 학교는 교가 속 ‘순결, 검소, 예절 바른 한국 여성 본이라네'라는 구절이 문제가 됐지만 구성원들의 반발로 현재도 유지하고 있다. 한 학교 관계자는 “학생, 학부모, 교사들이 변경을 추진해도 총동문회 등에서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교훈이나 교가의 역사성을 훼손할 수 있다’며 반대하고 나서는 일도 많아서 변경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저서 『훈의 시대』로 양성평등에 어긋나는 교가·교훈 속 표현에 문제를 제기한 김민섭 작가는 “언어는 사회 구성원이 시대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고 선택하는 것”이라며 “타인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인 ‘훈’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선택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교훈이나 교가를 전통으로 지키려는 학교들이 많아 실제로 이를 바꾸는 학교가 많지 않을 수도 있다”면서도 “학교 내에서 지속해서 교훈·교가를 바꾸자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달라진 시대상을 반영하는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심석용ㆍ최모란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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