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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때문에 옥살이… 제주 간첩 누명 51년만에 벗은 삼남매

중앙일보 2019.08.03 05:00
제주지방법원 전경.

제주지방법원 전경.

일명 ‘만년필 사건’으로 간첩에 내몰렸던 제주 1세대 농업경영인 고 김태주(1938~2019)씨 3남매 가 모두 51년 만에 무죄를 선고 받았다. 삼남매는 50여 년 전 일본에서 북한제 만년필을 선물 받았다는 이유로 재판에 넘겨져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았다.
 

고 김태주씨 형제 일본서 받은 만년필 때문에 간첩으로 신고당해
만년필에는 북한체제 선전용 ‘천리마’ '조선청진' 새겨져 있어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형…누명풀려 2015년 재심 신청해
법원 "당시 공산계열 위해 받았다는 증거 없어"

제주지방법원은 올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옥살이를 한 고 김태주씨에 이어 최근 남동생인 고 김모(1943~2014)씨와 여동생 김모(75)씨에도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고 김태주씨는 1963년 7월 육군 만기 제대 후 다음 달인 8월부터 농사개량구락부 회장으로 당선됐다. 이후 농업기술연수생으로 선발돼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県)의 한 감귤 농가에서 연수를 받기도 했다. 이후 오사카(大阪)로 넘어가 1967년 5월 북한 재일 조총련계 지도원 등에게 양복 1벌과 북 체제 선전용 만년필 3개를 선물 받았다. 
 
만년필 이미지. 위 이미지는 본 기사와 관계없음. [사진 unsplash]

만년필 이미지. 위 이미지는 본 기사와 관계없음. [사진 unsplash]

하지만 제주에 돌아온 그는 얼마 후 경찰 조사를 받아야 했다. 만년필에 씌여진 '조선 청진','CHULLIMA(천리마)' 등의 문구 때문에 간첩 누명을 썼기 때문이다. 이 만년필이 억울한 옥살이의 발단이었다. 만년필 안쪽에 적힌 ‘CHULLIMA’(천리마)와 ‘조선 청진’ 글을 보고 시계를 수리하던 업자가 경찰에 신고했다. 남동생과 여동생도 이 만년필이 북한에서 제조돼 배포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수사정보기관에 고지하지 않은 혐의(반공법 위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이 받은 만년필 안쪽에도 천리마와 조선 청진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천리마는 1950년대 북한에서 일어난 노력 동원과 사상 개조 운동이다. 조선 청진은 북한 함경북도의 지명을 뜻한다. 당시 경찰은 삼남매가 북한이 천리마운동의 성공을 찬양하기 위해 제작한 선전용 만년필을 수수했다며 반공법 위반 혐의 등을 적용했다. 고 김태주씨는 1968년 7월31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을 선고 받아 실제 옥살이를 했다. 남동생과 여동생은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아 실제 옥살이는 피했다. 
 
억울한 누명을 쓴 고 김태주씨는 생전 마지막 한으로 남은 간첩 혐의를 벗기 위해 2015년 2월 26일 두 동생과 함께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남동생은 2014년 이미 세상을 떠나 고인의 아들(53)이 재판에 참여했다. 2018년 9월17일 재심개시 결정이 내려졌지만 검찰이 즉시항고하면서 재심 첫 재판은 그 해 12월 21일에 열렸다. 결국 법원은 올해 1월 18일 무죄를 선고했지만 김태주씨는 이미 고인이 된 뒤였다. 
 
그는 1심 선고를 앞두고 2018년 12월 30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자신들에게 만년필을 건네준 사람이 당시 재일조총련계 대판부원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다”며 “반국가단체나 공산계열의 이익을 위해 받았다는 점도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무죄 이유를 밝혔다.  
 
제주=최충일 기자 choi.choongi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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