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 동북아 새판짜기 시도” 판단…문 대통령 전면전 선언

중앙선데이 2019.08.03 00:53 647호 3면 지면보기

[한·일 대충돌] 맞받아친 한국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가운데)이 2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일본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국가에서 배제하는 등 보복 조치를 취한 것과 관련해 관계장관 합동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가운데)이 2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일본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국가에서 배제하는 등 보복 조치를 취한 것과 관련해 관계장관 합동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8분20여 초 간 읽어내려간 2500자의 발언 내내 문재인 대통령의 목소리 톤은 일정했다. 급히 올라가거나 내려가지 않고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로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었다. 넥타이만 안 맸을 뿐 겉보기는 여느 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표현 하나하나는 그동안 문 대통령의 공개 발언에선 접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국무회의 발언 첫 생중계
모두발언 형식 띤 대국민 담화
단순한 대법 판결 불만 때문 아닌
성장 잠재력 노린 도발로 여겨

경제와 역사 연계한 아베에 분노
“한반도 프로세스에 몽니” 인식도
“대화 나서라” 외교적 해결 여지

2일 오전 일본이 각의에서 한국을 화이트국가에서 배제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의결한 지 약 4시간 뒤인 오후 2시 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임시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사태를 악화시키는 대단히 무모한 결정” “세계 경제에 큰 피해를 끼치는 이기적인 민폐 행위” “가해자인 일본이 큰소리치는 상황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 등과 같은 표현을 작심한 듯 이어갔다.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란 내용도 있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벌어질 사태의 책임이 전적으로 일본 정부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경고’한다”고 했다.
  
“경제·역사·정치적 요인 다 엮인 상황”
 
이날 문 대통령의 모두발언은 생중계됐다. 문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이 생중계된 것은 처음이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일본의 화이트국가 배제에 대해 정부나 대통령이 어떤 생각으로 대응해 나갈지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매우 컸다. 그래서 지체 없이 국민께 바로 알려드리려고 생중계를 택했다”고 말했다. 형식만 국무회의 모두발언이었을 뿐 사실상 대국민 담화였던 셈이다. 준(準) 대국민 담화는 사실상 대일 전면전을 선언한 것과도 같았다.
 
문 대통령이 이처럼 ‘강 대 강’ 대응에 나선 배경은 뭘까. 첫째는 일본 정부의 저의가 아예 한·일 관계,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새판을 짜려는 의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초 일본이 불화수소 등 전략물자 수출을 제한하기 시작했을 무렵 만난 한 청와대 참모의 말이다.
 
“일본의 전략물자 수출 제한 조치를 놓고 처음에는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불만을 참의원 선거에 활용하려는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우리의 경쟁력에 타격을 입혀 일본의 경제적 이익을 노리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들더라. 지금은 문화적·경제적·역사적·정치적 요인이 다 엮인 상황이라고 본다. 장기적 관점에서 한·일 관계를 다시 짜야 하는 것 아니냐는 수준까지 판단하게 된 배경이다.”
 
이런 인식은 최근 들어 더욱 확고해졌다. 여권의 한 핵심 인사는 “일본이 저렇게 나오는 게 단순히 대법원 판결 때문이 아니라 차제에 한국의 성장 잠재력을 떨어뜨리기 위한 도발이라고 보는 기류가 강하다”고 전했다. 실제로 문 대통령은 모두발언에서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일본 정부의 조치가 우리 경제를 공격하고 우리 경제의 미래성장을 가로막아 타격을 가하겠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못박았다.
 
둘째는 역사는 역사 문제대로 두되 협력할 건 협력해온 양국의 불문율을 일본이 뿌리부터 흔들어대는 데 대한 문 대통령의 ‘분노’다. 문 대통령과 오래 일한 청와대 참모는 “그간 과거사와는 별개로 이뤄져 왔던 양국 간 경제 협력을 역사 문제와 연계시켜 자유무역질서를 통째로 흔든 것에 대한 문 대통령의 문제의식이 컸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이 이날 “과거사로 인한 깊은 상처가 있지만 양국은 오랫동안 그 상처를 꿰매고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으며 상처를 치유하려 노력해 왔다. 그런데 가해자인 일본이 상처를 헤집는다면 국제사회의 양식이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셋째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과정에서 일본이 계속 몽니를 부려 왔다는 인식이 작용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우리는 일본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주요 구성원으로 보고 북·일 수교 등에 있어 일본을 적극 성원했다. 하지만 일본은 평창 겨울올림픽 때 한·미 연합훈련 연기에 반대하고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 국민의 전시 대피 연습을 주장하는 등 긴장을 조성했다”고 비판했다.  
  
“강경할수록 카드 늘고 협상력 향상”
 
그러면서 “일본이 지향하는 보통국가의 모습이 뭔지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북·미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동북아의 큰 흐름 변화에서 소외된 일본이 기존 질서를 흔들어 새판을 짜려 한다는 여권의 광범위한 의심과 맥이 닿아 있는 발언이다.
 
지금의 강경 대응은 전술적 차원에서 당연한 조치라는 해석도 나온다. 두 차례 일본에 고위급 인사를 파견하고, 영향력이 큰 3자인 미국이 현상동결 합의(standstill agreement)를 제안했지만 일본은 요지부동인 상황이다. 갈등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사태의 장기화는 불가피하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엔 협상을 통해 갈등 상황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협상을 위해선 오히려 강경해야 한다는 인식이 여권에는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친문 핵심 인사는 “아주 센 씨름을 붙기 전에 샅바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가. 갈등이 장기화되더라도 전쟁이 아닌 이상 결국엔 양국이 협상으로 국면 전환을 꾀할 수밖에 없는데 입장이 강경할수록 카드가 늘고 협상력이 향상되는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다. 이날 문 대통령은 모두발언 말미에 “우리 정부는 지금도 대응과 맞대응의 악순환을 원치 않는다. 멈출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일본 정부가 일방적이고 부당한 조치를 하루속히 철회하고 대화의 길로 나오는 것”이라며 외교적 해결 여지는 열어놓았다.
 
권호 기자 gnomon@joongang.co.kr

관련기사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