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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 논의 내부로 들어가 묻되 ‘옆길’로 빠지진 말아야

중앙선데이 2019.08.03 00:20 647호 22면 지면보기

[김영민의 공부란 무엇인가] 질문의 기술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정리되지 않은 자료의 나열이나 장황한 묘사만으로는 훌륭한 연구가 될 수 없다. 방광에 아무리 액체가 가득해도 갈증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자료가 아무리 가득해도 엉뚱한 위치에 놓여 있다면 지적 호기심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집적된 자료에게 제 위치를 찾아 줄 수 있을까? 그 자료 연구가 답이라면 문제는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연구 질문(research question)이 없는 연구는 조타수가 없는 선박과 같다. 이리저리 모은 자료나 상념의 망망대해를 하릴없이 떠돌다가, 시야에 들어오는 아무 결론에 정박한 연구를 반기는 사람들은 드물 것이다. 좋은 연구는 대개 좋은 연구 질문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저작의 ‘연구 질문’ 찾지 못하면
자신의 편의대로 읽게 되기 십상

질문은 말끝 안 흐리고 확실하게
완성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게 좋아

듣기만 하면 무임 승차하려는 것
공들여 준비한 질문이 필요할 때

질문은 연구자뿐 아니라 독자에게도 필요하다. 주어진 정보를 수동적으로 취합하는 데 그친다면, 기억의 방광은 늘어날지 몰라도, 지적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지적 갈증을 해소하고 자신의 인식 지평을 확대하려면, 독자 역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1차로 던져야 할 질문은, “이 연구저작이 내게 혹은 이 민족에게 혹은 인류에게 무슨 쓸모가 있나”가 아니라, “이 저작이 연구 질문을 과연 제대로 던지고 답하는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해당 저작의 연구 질문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한다.
  
좋은 질문 유무가 연구 모임 수준 좌우
 
안타깝게도 세상에 돌아다니는 연구저작이 모두 연구 질문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자신을 맛없게 만들어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동물처럼, 어떤 흥미로운 질문도 가지고 있지 않아 무료하기 짝이 없는 연구들, 그리하여 독자들의 독서 의욕을 잃게 만들어 자신을 보호하려는 연구들이 적지 않게 있다. 그러나 독자는 일단 연구 질문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노련한 발골업자처럼 숨은 연구 질문을 찾아내야 한다. 해당 저작의 연구 질문을 찾아내지 못하면, 해당 저작을 저자의 의도보다는 성급하게 자신의 편의대로 읽게 되기 십상이다.
 
질문처럼 생겨 먹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연구 질문이 아닌 경우도 있다. 학문의 세계에서 말하는 연구 질문이란 연구를 통해 답할 수 있는 성격의 질문을 말한다. 예컨대, 특정 시대의 정책과 그 시대의 신념체계와의 관계 같은 것은 연구를 통해 구명할 만한 문제일 공산이 크다. 그러나 “누가 더러운 인절미를 사랑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은 도대체 어떤 연구를 통해 답해야 하는지 모를 난감한 질문이다.
 
연구 질문이 반드시 질문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므로, 독자 스스로 해당 저작의 연구 질문을 재구성해 보아야 할 때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이 저작이 답이라면 문제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아무리 헤집어봐도 연구 질문이 없는 경우는 어떡하냐고? 연구 질문을 완전히 결여한 밀가루 반죽 같은 저작이라면, 왜 이 사람은 좋은 질문을 던질 의도 혹은 능력이 없는 것일까를 자신의 연구 질문으로 삼으며 읽어나가면 된다.
 
질문은 연구뿐 아니라 토론의 경우에도 필요하다. 논문 발표에 따르는 질의 토론 시간은 그러한 질문을 위한 장이다. 질의 토론 시간에 얼마나 좋은 질문이 제기되느냐가 해당 연구 모임의 수준을 보여준다. 좋은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일단 질문을 완성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무책임한 사람일수록 대충 단어를 몇 개 던지고 상대가 알아서 이해해주기를 기대하곤 한다. 그러한 행동은 자신이 구사해야 할 지성을 남에게 외주 주는 일이다. “이렇게 하면 논리가 좀…”이라고 말을 흐리지 말고 “이렇게 하면 논리적 비약이 생기게 됩니다”라고 완성된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의 반응을 보아가면서, 편의적으로 원래 질문을 왜곡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논리가 좀…” (상대방이 화를 낼 것 같은 낌새를 알아채고는) “…비약하지 않을 수 없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하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등등.
 
문장을 만들었다고 해서 곧 좋은 연구 질문이나 좋은 토론 질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구글 번역기가 만든 것 같은 문장을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이번 학회는 아름다운 지역에 있는 멋진 장소. 멋진 영양 발표, 점심 발표는 위대했습니다. 장소는 동시에 활기차고 조용합니다. 도시의 오아시스.” 이래서는 무슨 말을 하는지 헤아리기 어렵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러한 문장을 알아들은 양, 대답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 함께 좋은 질문을 가졌습니다. 멋진 아이디어가 공중에 뜨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무언가를 마실 수 있기를 바라며 앉습니다. 그러나 매우 뜨겁습니다. 지나치지 않고 떠나십시오. 희망 없는 놀랄 만한 장소, 큰 위치, 매우 맛있는 주장을 위해 거기에 갔다. 그리고 그것은 컸다! 매우 멋진 신세계.” 적어도 학술의 장에서만큼은, 골반이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 한다.
 
말을 바로 한다고 해서, 꼭 좋은 질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질문을 한다고 해 놓고 일장 연설을 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주를 보아야 네 연구가 먼지인 줄 알겠느냐”로 시작하여 사자성어로 끝나는 느닷없는 연설들. 이런 것들은 좋은 질문이 될 수 없다. 좁아터진 정신의 방광을 떠나려는 오줌처럼, 거세게 시작되어 용두사미로 끝나는 연설이 예리한 질문으로 연결되는 경우는 드물다. 일장 연설 끝에 기껏해야 “이 발표가 한국 사회에 주는 교훈이 뭔가요” 같은 나른한 질문을 제기하곤 한다.
 
그러한 정신적 노상 방뇨의 특징은, 상대의 관점과는 동떨어진 자신의 관점을 선포하는 데 열중한 나머지 발표자와 접점을 찾는 데는 소홀히 한다는 점이다. 현상의 정확한 기술(記述) 여부를 논하는 자리에서 느닷없이 규범적인(normative) 질문을 던지거나, 역사적 논의를 하게끔 되어 있는 논의의 장에서 발표자의 취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맥락 없이 철학적 질문을 던져서는 생산적인 학술 논의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발표자와 완전히 동떨어진 입지에서 질문이나 연설을 해보았자, 발표자가 “아, 그러세요.”라고 말하고 더는 대꾸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논의가 평행선을 달리지 않으려면, 상대 논의 내부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예컨대, 발표 내용이 갖는 내적 모순을 지적하면 대개의 발표자는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 것이다.
  
학술의 장, 골반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상대방 논의의 내부에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해서, 너무 세세한 문제에 집착하라는 말은 아니다. 너무 세세한 나머지, 대다수 청중은 관심을 갖지 않을 만한 사안을 집어내어 질문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 그런 질문은 전체 토론 활성화에 기여한다기보다는, 잘난척하는 지적질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소소한 질문은 공식 질의응답 시간이 끝난 뒤에 개인적으로 물어도 족하다. 공식 질의 응답시간에는, 가능한 한 다른 청중들도 관심을 가질 만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질문은, 상대 주장이 경쟁하는 여러 주장 중의 하나임을 상기시키고, 논의 지형 전체를 재고할 수 있게끔 해줄 것이다.
 
연구를 위해 질문을 던지는 일, 토론을 위해 질문을 던지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라면, 아예 질문하기를 포기하고 수동적인 관전자로 남고자 하려 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함께 모여 서로의 생각을 나누기로 토론의 장에서 그저 듣기만 하는 것은 무임승차자의 태도와 다를 바 없다. 지금 남들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기꺼이 개진하고 있는 사람은 용기를 짜내어 간신히 연단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소심한 발표자는 자신을 외줄타기를 하는 광대로 느끼기도 하고, 정력에 별다른 효력이 없는 뱀술을 파는 약장수로 느끼기도 하고, 담론 전체를 무리하게 들어 올리려는 차력사로 느끼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그들은 그 순간 상대의 관심을 갈구하는 외로운 존재들이다. 당신이 공들여 준비한 질문은 그들의 외로움과 민망함을 잠시나마 경감시켜줄 것이다. 자, 이제 당신이 질문할 차례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브린모어대학 교수를 지냈다. 영문저서로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2018)가 있으며, 에세이집으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가 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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