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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가장 고결한 이들이 가장 너그러웠다

중앙선데이 2019.08.03 00:20 647호 31면 지면보기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끼어들고 싶지 않았는데, 참새가 방앗간에 내려앉고 말았다. 끼어들기 싫었던 건 도발한 일본 정부나 대처하는 우리 정부나 이성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탓이었다. 양국 정부 모두 딴 의도가 있는데 거기다 대고 이성을 말한들, 황야에서 홀로 외치는 공허한 함성이 될 뿐이다.
 

이웃집 시비에 부부싸움하는 듯
생각 다르면 무작정 친일로 모는
막무가내 반일은 자격지심 소산
당당해야 일본 잘못 바로잡는다

하지만 그보다 싫었던 건, 너도 나도 생각(그것을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면)을 쏟아내고, 또 그것에 내편 네편 갈리어 물고 뜯는 진창에 발 담그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까닭이다. 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잘못 들어섰다간 양쪽에서 날아온 돌에 맞기 십상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웃집이 걸어온 시비에 부부싸움을 벌이는 양상이 점점 커져 자칫 부부 아닌 원수로 만들까 하는 기우(杞憂)가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든다.
 
이 논쟁에 발을 들여놓으려면 먼저 ‘인증’을 해야 한다. “일본의 식민 지배가 불법이냐 아니냐”라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질문조차 어리석다. 그것은 법의 문제가 아니라 선악의 문제다. 국제사회는 기본적으로 약육강식의 사회다. 힘센 나라의 논리가 곧 법인 것이다. 트럼프나 시진핑이 하는 짓이 다 뭔가. 국제법이란 도덕 교과서에 불과한 것이며, 거기 기록된 선악은 힘센 국가들의 생색이고 힘없는 국가들의 바람일 뿐이다.
 
배상과 보상 문제도 복잡할 게 없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받은 돈을 위안부나 징용공 피해자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경제 개발의 종잣돈으로 사용해 발전을 이룬 만큼, 이제 우리가 피해자들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보듬어주는 게 옳다고 나는 믿는다. 일본처럼 편협한 상대에겐 특히 그렇다. 평소 피해자들의 아픔에 나 몰라라 하다가 문제가 되고나면 일본에 쌍심지를 켜고 덤벼드는 게 애국애족이 아니다.
 
경제 보복이라는 계산된 도발을 당한 이상 강력한 대응을 해야 한다는 것도 내 생각이다. 대화도 말이 통하는 상대와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싸움을 하려면 전략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이 ‘상유십이(尙有十二)’를 외치고 거북선 식당에 가서 옥포해전을 거론하는 건 하지하책(下之下策)이다. 대통령 비서가 국민들에게 ‘친일’과 ‘반일’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건 어리석다 못해 위험한 발상이다.  
 
선데이 칼럼 8/3

선데이 칼럼 8/3

여당의 싱크탱크인 연구원 원장이 바뀔 때부터 알아봤지만, “총선에 유리한 한일 갈등”을 부채질하려는 목적밖에 없어 보인다. 그 사이 국민은 멍 들고 기업은 병 들며 경제는 병이 고황에 들어도 정권을 연장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 대수랴. 이 또한 일본 정부의 계산 속에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이게 내 생각이다. 정답이 아니라 내 생각일 뿐이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다른 거다. 이른바 ‘친일(親日)’이라는 말을 되짚어보자는 거다. 우리에게 친일은 친미(親美)나 친중(親中)과 달리 거의 ‘매국(賣國)’이라는 의미가 중첩된다. 4분의3세기가 지났는데도 나라를 빼앗겼던 분노와 수치의 감정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을 상대하는 데는 냉철한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다.
 
누구는 부역자 청산이 미흡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전후 철저한 청산작업을 펼쳤던 프랑스와 비교하기도 한다. 이것도 반만 맞는 말이다. 프랑스가 청산에 철저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옥석을 가리는 작업도 철저한 프랑스였다.
 
파리가 해방된 뒤 독일군과 동침한 여인들이 거리로 끌려나와 삭발을 당하고 매를 맞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많은 지식인들은 이 같은 ‘야만적 가학성’을 비판했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였던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공개 망신을 당하는 여성들을 촬영하길 거부했고, 부역자 청산에 가장 앞장섰던 공산주의 계열의 프랑스국내군(FFI) 대원들이 대중의 폭력으로부터 그 여성들을 보호했다.
 
이런 이성이 있었기에 프랑스의 청산 작업은 더욱 완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반일’에서 벗어나는 말을 하면 ‘토착왜구’로 몰아붙이는 우리네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이런 태도는 자격지심에서 비롯된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언론인 아녜스 푸아리에가 지적하듯 “점령기 때 수동적이었을수록 나치 협력자들에게 더욱 심한 복수심을 드러냈고, 가장 고결한 이들이 가장 너그러웠다.”(『파리 좌안 1940~50』)
 
이제는 자격지심에서 벗어나도 되지 않겠나. 그럴 만한 힘이 우리에겐 있다. 한번도 성공한 적 없던 일본산 불매운동이었다지만 이번엔 다를 것 같은 이유도 그래서다. 제조업 소재는 몰라도 일반 국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일제(日製)가 더는 없는 까닭이다. 막무가내식 반일은 자격지심을 쥐고 휘두르는 주먹이다. 권투에서의 오픈 블로처럼 동작만 크지 힘이 실리지 않는다. 보다 강력한 펀치는 아무것도 잡지않고 꽉 쥔 주먹에서 나온다. 일본의 과거 잘못은 용서를 하고, 그래서 더 따끔하게 일본의 현재 잘못을 바로잡아줄 수 있는, 그래서 ‘죽창’이 필요 없는 ‘당당친일(堂堂親日)’이 그것이다.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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