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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재 유야무야…단단해지는 북ㆍ중ㆍ러, 틈 생기는 한ㆍ미ㆍ일

중앙일보 2019.08.02 19:23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2일 오전(현지시간) 태국 방콕 센타라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외교장관회의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앞줄 왼쪽 뒷모습)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오른쪽) 옆으로 지나가고 있다. [뉴시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2일 오전(현지시간) 태국 방콕 센타라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외교장관회의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앞줄 왼쪽 뒷모습)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오른쪽) 옆으로 지나가고 있다. [뉴시스]

34시간 15분. 2일 오전 일본 정부가 각의 결정을 통해 한국을 화이트 국가 리스트에서 배제하기 전까지 한ㆍ미ㆍ일 외교장관들이 함께 태국 방콕에 머물렀던 시간이다. 하지만 그사이 강경화 장관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상은 단 한 번도 한자리에 모이지 않았다. 각기 10개 내외의 양자 및 다자회담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정작 셋이 모일 기회는 잡지 못했다. 폼페이오 장관이 방콕에 도착하기 전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 휴전 합의(standstill agreement)를 제안했다는 보도가 나오며 미국의 중재 역할이 관심을 모았지만, 결국 일본은 화이트 국가 결정을 강행했다.

강경화 "한·미, 대화 해결 노력…日이 이 상황 만들어"

 한ㆍ미ㆍ일 외교장관회담이 열린 것은 2일 오후 4시30분(한국시간 오후 6시30분)이나 돼서였다. 그것도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세션이 진행되는 중 빠져나와서다. 다자회의 일정이 길어지면서 그나마 한ㆍ미ㆍ일 회담에 앞서 열려고 했던 한ㆍ미 및 미ㆍ일 간 양자 외교장관회담은 취소됐다. 

한미일, 34시간 동안 별도 회담 없어
2일 日 보복조치 발표 후 뒤늦은 회담
폼페이오 다자회의서도 한·일 언급·無

강 장관은 회담 뒤 기자들과 만나 “일본의 화이트 리스트 결정에 대해 강한 유감 표명을 전달하고 즉각 철회와 협의를 통해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대화에 나오라는 이야기를 분명히 했다”고 소개했다. 또 “오늘 이 사태가 있기 전까지 우리가 끝까지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자는 이야기를 전했고 미국도 같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데 대해 굉장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도 이 상황에 대해 많은 우려를 갖고 있고 ‘앞으로 어렵지만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지 역할을 다 하겠다’고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또 “이런 상황에 대해 일본이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큰 관심이 쏠렸던 3자 회담이지만, 취재진은 회담장 입장도 허용되지 않았다. 세 장관이 회담장에 들어가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고 나왔고, 간단하게 사진만 찍은 뒤 각기 일정을 위해 자리를 떴다. 사진을 찍을 때도 강 장관과 고노 외상은 폼페이오 장관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섰다. 폼페이오 장관은 웃으면서 강 장관과 고노 외상에게 양팔을 뻗기도 했지만, 강 장관과 고노 외상은 시종일관 굳은 표정이었다. 대화를 나누거나 악수를 하지도 않았다.
3국 장관은 여느 때처럼 한ㆍ미ㆍ일 안보 협력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했지만, 일본이 안보상 이유로 한국을 화이트 국가 리스트에서 제외한 이날만큼은 공허한 외침이나 다름없었다.  

화이트 국가 결정 전날 한·미·일 아닌 미·일·호주 회동

폼페이오 장관은 ARF 참석을 위해 방콕으로 오는 기내에서 “한국과 일본이 접점을 찾는 것은 양국뿐 아니라 미국에도 중요하다. 우리가 이를 도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지만, 방콕에서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었다.  
일본의 화이트 국가 결정 전날인 1일 폼페이오 장관은 중국, 베트남, 태국 등과 양자 외교장관회담을 했다. 동맹국들과 3자 협의도 했는데, 한ㆍ미ㆍ일이 아닌 미ㆍ일ㆍ호주 외교장관회담이었다. 강 장관은 그 사이 아세안과 캐나다, 유럽연합(EU) 등을 상대로 일본 조치의 부당함을 알리며 뛰었는데, 폼페이오 장관과는 제대로 만날 기회도 없었다.    
일본과 호주는 인도와 함께 미국의 인도ㆍ태평양전략의 네 기둥을 맡고 있는 나라다. 중국을 견제하는 의미가 있는 인도ㆍ태평양전략에 적극 참여하는 데 신중한 한국과는 다르다. 이번 아세안 관련 회의에서 미국의 우선순위는 결국 한ㆍ일 갈등 중재보다 인도ㆍ태평양전략 강화 아니냐는 이야기가 외교가에서 나오는 이유다.  

폼페이오, 다자회의에서도 日 조치 언급 안해 

실제 2일 오후 한ㆍ미ㆍ일을 비롯, 아세안 10개국과 중국과 러시아 등 18개국 대표가 참석한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외교장관회의에서 폼페이오 장관은 한ㆍ일 관계나 자유 무역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인도ㆍ태평양 구상, 남중국해 문제, 미얀마의 민족갈등 등 인권 문제 등에 대해서만 발언했다고 한다. 동맹국도 아닌 비비안 발라크리슈난 싱가포르 외교장관이 ‘큰 나라의 일방주의’에 우려를 표하며 다자주의와 자유 무역을 강조한 것과 대비됐다. 비비안 장관은 앞서 오전에 열린 아세안+3(한ㆍ중ㆍ일) 외교장관회의에서도 “화이트 국가 리스트에서 한국을 뺄 게 아니라 아세안을 넣어야 한다. 신뢰 관계를 증진해 상호 간 의존도를 높이는 것이 우리 지역의 공동 번영을 위해 필요하다”며 고노 장관의 화이트 국가 결정 관련 발언을 반박했다. 대미 소식통은 “미국의 휴전 합의 제안도 애초에 일본의 화이트 국가 결정을 막기는 어려우니 한국을 향해 노력했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한 일종의 제스쳐일 수도 있다”고 전했다.  
일본의 화이트 국가 결정 강행으로 이제 장기간 한ㆍ일 관계가 냉각되는 것은 물론이고, 한ㆍ미ㆍ일 안보 협력에도 악영향이 예상된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가 정상급 교류를 활성화하며 밀착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다.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미국이 일본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이번 조치에 대해 미·일 간 물밑 소통이 활발하게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며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놓곤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보다 장기 전략 차원에서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방콕=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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