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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분노 진짜 이유 "징용판결 불만? 韓 미래성장 짓밟은 것"

중앙일보 2019.08.02 18:58
문재인 대통령이 2일 오후 청와대에서 일본의 추가 경제 보복 조치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임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 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2일 오후 청와대에서 일본의 추가 경제 보복 조치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임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 기자단

8분 20여 초간 읽어내려간 2500자의 발언 내내 문재인 대통령의 목소리 톤은 일정했다. 급히 올라가거나 내려가지 않고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로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었다. 넥타이만 안 맸을 뿐 겉보기는 여느 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표현 하나하나는 그간 문 대통령의 공개 발언에서 접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2일 오전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백색 국가, 수출심사 우대국)에서 배제하는 수출무역 관리령 개정안을 각료회의에서 의결한 이후인 오후 2시, 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임시국무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사태를 악화시키는 대단히 무모한 결정”, “세계 경제에 큰 피해를 끼치는 이기적인 민폐 행위”, “가해자인 일본이 큰소리치는 상황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 와 같은 표현을 작심한 듯 이어갔다.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도 있었다. 그러면서 "깊은 유감”을 표한 문 대통령은 "앞으로 벌어질 사태의 책임이 전적으로 일본 정부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경고'한다”고 했다.  
이날 문 대통령의 모두발언은 생중계됐다. 문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이 생중계된 것은 처음이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일본의 백색국가 배제에 대해 정부나 대통령이 어떤 생각으로 대응해나갈지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매우 컸다. 지체 없이 국민께 바로 알려드리고자 생중계를 택했다”고 말했다. 형식만 국무회의 모두발언이었을 뿐 사실상 대국민 담화였던 셈이다.
 
준(準) 대국민 담화는 사실상 대일(對日) 전면전을 선언한 것과도 같았다.  실제로 문 대통령은 '맞대응'이란 표현을 썼다.    
 
문 대통령은 “비록 일본이 경제 강국이지만 우리 경제에 피해를 입히려 든다면, 우리 역시 맞대응할 수 있는 방안들을 가지고 있다” 면서 "우리 경제를 의도적으로 타격한다면 일본도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국무회의가 끝난 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우리도 일본을 백색국가(수출절차 간소화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고, 김현종 청와대 안보실 2차장은 "우리에 대한 신뢰 결여와 안보상의 문제를 제기하는 나라(일본)와 과연 민감한 군사정보 공유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를 포함해, 종합적인 대응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GSOMIA) 연장 거부 카드를 꺼낸 것이다.
 
 
문 대통령이 '강(强)대 강(强)'으로 대응하고 나선 배경은 뭘까. 
첫 번째는 일본 정부의 저의가 아예 한ㆍ일 관계, 나아가 동북아의 새 판을 짜려는 의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초 일본이 불화수소(에칭 가스) 등의 전략물자 수출을 제한하기 시작했을 무렵 만난 한 청와대 참모의 말이다.  
 
“일본의 전략물자 수출 제한 조치를 놓고 처음에는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불만을 참의원 선거에서 활용하려는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우리의 경쟁력에 타격을 입혀 일본의 경제적 이익을 노리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들더라. 지금은 문화적ㆍ경제적ㆍ역사적ㆍ정치적 요인이 다 엮인 상황이라고 본다. 장기적 관점에서 한ㆍ일 관계를 다시 짜야 하는 것 아니냐는 수준까지 판단하게 된 배경이다.”
 
  이런 인식은 최근 들어 더 확고해졌다. 여권의 한 핵심 인사는 “일본이 저렇게 나오는 것이 단순히 대법원의 판결 때문이 아니라 차제에 한국의 성장 잠재력을 떨어뜨리기 위한 도발이라고 보는 기류가 강하다”고 전했다. 실제 문 대통령은 모두발언에서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일본 정부의 조치가 우리 경제를 공격하고 우리 경제의 미래성장을 가로막아 타격을 가하겠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못 박았다.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도 이날 기자들과 만나 “1194개에 달하는 핵심 소재 및 부품에 대한 사실상의 수출규제를 가함으로써 한국의 미래 성장을 저해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역사는 역사 문제대로 두되, 협력할 건 협력해온 양국의 불문율을 일본이 뿌리부터 흔들어대는 것에 대한 문 대통령의 '분노'다.
 
문 대통령과 오래 일한 청와대 참모는 “그간 과거사와는 별개로 이뤄져 왔던 양국 간 경제 협력을 역사 문제와 연계시켜 자유무역질서를 통째로 흔든 것에 대한 문대통령의 문제의식이 컸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이 “과거사로 인한 깊은 상처가 있지만, 양국은 오랫동안 그 상처를 꿰매고,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으며 상처를 치유하려 노력해왔다. 그런데 가해자인 일본이 상처를 헤집는다면 국제사회의 양식이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게 이런 맥락에서라고 한다.

 
 
일본, 한국 백색국가 제외.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일본, 한국 백색국가 제외.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세 번째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과정에서 일본이 계속 몽니를 부려왔다는 인식이 작용했다. 김현종 2차장은 “우리는 일본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주요 구성원으로 보고 북일 수교 등에 있어 일본을 적극적으로 성원했다. 하지만 일본은 평창올림픽 때 한ㆍ미 연합훈련 연기를 반대하고,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 국민의 전시 대피 연습을 주장하는 등 긴장을 조성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일본이 지향하는 보통국가의 모습이 뭔지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북·미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동북아의 큰 흐름 변화에서 소외된 일본이 기존 질서를 흔들어 새 판을 짜려 한다는 여권의 광범위한 의심과 맥이 닿아있는 발언이다.

 
지금의 강경 대응은 전술적 차원에서 당연한 조치라는 해석도 나온다. 두 차례 일본에 고위급 인사를 파견하고, 영향력이 큰 3자인 미국이 현상동결합의(standstill agreement)를 제안했지만, 일본이 요지부동인 상황이다. 갈등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사태의 장기화는 불가피하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에는 협상을 통해 갈등 상황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협상을 위해선 오히려 강경해야 한다는 인식이 여권에는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친문 핵심 인사는 “아주 센 씨름을 한판 붙기 전에 샅바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가. 갈등이 장기화하더라도 전쟁이 아닌 이상 결국엔 양국이 협상으로 국면 전환을 꾀할 수밖에 없는데, 입장이 강경할수록 카드가 늘고 협상력이 향상되는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다. 

이날 문 대통령은 모두발언 말미에 “우리 정부는 지금도 대응과 맞대응의 악순환을 원치 않는다. 멈출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일본 정부가 일방적이고 부당한 조치를 하루속히 철회하고 대화의 길로 나오는 것”이라면서 외교적 해결 여지는 열어놓았다.      
 
권호 기자 gnom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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