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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였던 쇼팽과 리스트, 왜 서로 할퀴는 적이 되었나

중앙일보 2019.08.02 12:00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35)

리스트와 상드. 상드의 아들 모리스의 스케치. 1837경.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아주 크게 놀란 엄마'라고 적혀있다. 리스트가 마리 다구와 노앙에 체류할 때 그려진 것 같다. 조르주 상드 기념관, 라 샤트르 (La Chatre, Musée George Sand et De La Vallée Noire) 소장

리스트와 상드. 상드의 아들 모리스의 스케치. 1837경.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아주 크게 놀란 엄마'라고 적혀있다. 리스트가 마리 다구와 노앙에 체류할 때 그려진 것 같다. 조르주 상드 기념관, 라 샤트르 (La Chatre, Musée George Sand et De La Vallée Noire) 소장

 
리스트는, 쇼팽의 아파트에서 자신이 저지른 연애사건에 쇼팽이 크게 실망했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본 시리즈 19편 참조) 때문에 둘의 간격을 벌린 그 사건에 자신을 책망했을 수도 있다. 쇼팽을 높이 평가했고, 그에게 가까이 가려 노력했던 리스트였는데 쇼팽에게 둘러쳐진 울타리가 더 높아진 것을 알고 리스트는 더 안타까워했을 듯하다.
 
리스트가 마리 다구와 도피 여행으로 파리를 떠나 스위스 등지를 떠돌 때, (본 시리즈 26편 참조) 그는 파리의 음악계에서 자신의 명성이 퇴색되어가는 것을 걱정했다. 리스트는 집에서 기저귀만 갈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무대에 서서 청중의 환호를 유도하고 그들의 갈채에서 활력을 얻었던 사람이었다.
 
리스트가 파리를 떠나있는 동안 또 한 사람의 젊은 피아니스트 탈베르크(Sigismund Thalberg, 1812~1871)가 파리에 왔다. 쇼팽도 파리로 오기 전 빈에서 그를 만났었다. 탈베르크와 리스트는 비슷한 나이 그리고 화려한 기교파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특히 둘은 10대에 빈을 중심으로 교육받고 활동을 해서 비교와 경쟁을 피할 수 없었고 라이벌 의식도 강했다.
 
탈베르크가 파리에서 자신의 빈자리를 메우고 자신은 잊힌 듯하자 라스트는 자극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유배된 나폴레옹이라고 생각했다. 마리 다구가 사치스러운 생활로 경제적 압박을 더했고 특유의 구속적 성격으로 리스트를 몰아가자 그러잖아도 외부 활동이 그리웠던 그는 무대로 복귀하려 서둘렀다.
 
본격적인 파리 귀환에 앞서 짧은 파리 방문을 계획했을 때 그가 우선순위를 두고 한 것은 쇼팽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었다. 리스트의 어머니 안나는 아들이 며칠간 파리에 머무는 동안 그의 친한 친구들을 꼭 만나고 싶어 한다고 하는데 그 첫 번째가 쇼팽이라고 쇼팽에게 알렸다.
 
리스트가 파리에 들르자, 쇼팽은 자신의 아파트로 그를 초대하여 따뜻하게 대했다. 쇼팽은, 그가 탈베르크보다 훨씬 낫다고 말했다. 탈베르크에 대한 경쟁심에 초조한 감이 있던 리스트는 쇼팽의 환대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쇼팽과의 우정도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도 품었다. 파리 음악계의 분위기를 파악한 리스트는 스위스로 돌아갔다.
 
리스트는 마리를 설득하여 1836년 가을, 파리로 돌아왔다. 한동안 리스트와 쇼팽은 가까이 지냈다. 복귀 얼마 후 마리 다구의 살롱에서 쇼팽이 상드를 소개받았다는 것과 리스트와 마리 다구는 두 사람을 이어 주려고 힘을 썼다는 것은 앞서 언급되었다.
 
1837년 초는 리스트가 파리로 복귀했다. 그가 음악 활동을 시작하자 온 파리는 그와 탈베르크, 화려한 두 기교파 피아니스트로 인해 떠들썩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을 비교하기에 바빴다. 벨지오조소 공주의 살롱에서 벌어진 두 사람의 음악 결투는 주목을 받았다. 자선 연주회 형식의 이 모임에 파리의 문화계 인사들이 대거 모였고 두 사람은 현란한 자신들의 기교를 아낌없이 풀어놓았다.
 
24세의 탈베르크. 기교파 연주자로 한때 리스트와 경쟁을 벌였다. 석판화. 1836. Henri Grevedon. 프랑스 국립 도서관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24세의 탈베르크. 기교파 연주자로 한때 리스트와 경쟁을 벌였다. 석판화. 1836. Henri Grevedon. 프랑스 국립 도서관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공주는 “탈베르크는 세계 제일의 피아니스트이고 리스트는 유일무이한 피아니스트이다”라고 그날 대결의 결말을 지었다. 하지만 그 직전, 리스트의 연주회에서 그의 연주를 처음으로 직접 들은 탈베르크는 이미 리스트의 솜씨에 얼이 빠져있었다. 그는 그 음악 결투 이후 연주 여행을 기획하고 실행할 때, 리스트와의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주의했다. 탈베르크는 유럽의 여러 곳 외에 리스트가 가지 않는 북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까지 갔다.
 
역사는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가 후세에 미친 영향을 주요 지표로 삼는다. 연주에 있어서 두 사람 모두가 훌륭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녹음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 그 연주의 감흥을 담아둘 수는 없었다. 만년에 중요한 곡도 다수 남겼고, 후학을 키워 하나의 학파를 이룬 리스트가 탈베르크보다 역사의 평가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는 것 같다.
 
그러나 탈베르크와 리스트의 불꽃 튀는 경쟁 속에서도 많은 사람은 쇼팽을 잊지 않았다. ‘쇼팽의 사운드에는 리스트, 탈베르크의 연주에서와 같은 강한 울림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연주에 매료된다’라는 힐러의 회고와, “리스트와 탈베르크 중 누가 최고냐 하는 질문에 한가지 답밖에 없다. 쇼팽이다”라는 에른스트 르구베(Ernst Legouvé)의 논평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쇼팽이 작곡한 수많은 명곡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탈레르크와 일전을 치른 후 리스트도 유럽을 돌면서 성공적 공연을 이어갔는데, 그의 연주 여행 뒤에는 마리 다구의 속박도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마리 다구는 주위 사람을 배려하는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조르주 상드가 스위스에 있던 리스트-마리 커플을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그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여행을 할 때였다. 마리 다구는 여행 중 편히 쉬고 싶어하는 일행에게 갑자기, 그것도 진지하게 자신이 정한 주제에 대한 토론을 제안하여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리스트가 더 자주 순회 연주 여행을 실행하자, 마리 다구는 불만은 커갔고 둘의 사이는 더욱 힘들어졌다. 작사 샤를 디디에(Charles Didier)가 보기에도 두 사람은 위태위태했다. 식어가는 두 사람의 관계는 마리 다구를 외통수로 몰았다. 이즈음 마리 다구는 상드와도 틀어졌는데 그것은 그녀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상드의 애정 행각을 조롱한 것이 친구를 통해 노앙에 있던 그녀에게까지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마리 다구. Théodore Chassériau 그림. 1841. 루브르 미술관 소장.

마리 다구. Théodore Chassériau 그림. 1841. 루브르 미술관 소장.

 
점점 외톨이가 되어가고 있던 마리 다구는 멀어져 가는 리스트에게 절망했고, 반면 가까워져 가고 있던 쇼팽-상드 커플에게는 질투했다. 그녀는 편집광적으로 리스트에게 둘을 모함했다. 두 사람을 적으로 만들어 리스트와 동지애적 사랑을 복구하려 했다.
 
1841년 1월, 리스트가 아일랜드에서 공연 중일 때도 마리 다구의 모함은 편지로 끊이질 않았다. 계속된 모함에 리스트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렇다면 조용히 한 방 먹이겠다’고 마리 다구에게 결의를 털어놓고 있었다. 얼마 후 리스트는 파리로 돌아왔다. 그의 파리 연주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해 4월, 마요르카에서 돌아온 쇼팽은 귀환 연주회를 열었다. 리스트도 연주회에 참석했다. 앞서 얘기했듯이 연주회에서 쇼팽은 모처럼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 연주회에 대해서 신문은 경쟁적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 신문에는 리스트의 평도 실렸다. 그도 쇼팽의 공연과 곡을 극찬했다. “그는 슬픔이 담긴 깊고 순수하고 환상적인 자신의 시적(詩的) 정수를 드러냈다”고 했고 “곡에는 천재의 작품을 특징짓는 자유로움과 매력이 있다”라고도 했다.
 
그런데 리스트가 그 연주회에서 돌출 행동을 했다. 리스트는 마지막 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대로 올라가서는 혼신의 연주로 지쳐있는 쇼팽을 안아 일으켜 무대 뒤로 데리고 나가버렸다. 이것은 쇼팽에게 쏠려야 할 청중의 시선을 가로채려는 행동이었다. 다음 날 신문의 만평과 가십난은 리스트의 상식 밖 행동을 소재로 채워졌다.
 
며칠 후 신문에 실린, 연주회와 쇼팽의 음악을 칭찬하는 리스트의 평은 오히려 쇼팽을 자극했다. 쇼팽은 리스트의 칭찬을 빈정대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리스트의 돌출 행동에는 마리 다구의 역할이 컸다. 결정적으로 연주회를 앞두고 그녀는 리스트에게, ‘쇼팽의 연주회는 당신의 명성에 도전하려는 의도로 기획되었다’고 하며 다시 한번 충동질했었다.
 
프레데릭 쇼팽. 상드의 스케치. 1841. 프랑스 국립 도서관 소장.

프레데릭 쇼팽. 상드의 스케치. 1841. 프랑스 국립 도서관 소장.

 
쇼팽과의 사이를 개선해 보려는 리스트의 속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쇼팽과 리스트 사이에 깊고 결정적인 골을 만들었다. 쇼팽은 완전히 그에게 마음을 돌려버렸다. 리스트의 쇼팽에 대한 경쟁심은 심각한 것이 아니었고 개방적인 리스트의 성격을 고려하면, 둘 사이의 문제는 언젠가 풀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둘의 관계는 회복 불능의 지경으로 몰렸다. 마리 다구의 훼방은 두 음악 거장의 우정을 망쳐놓았다. 음악계에 발이 넓고 영향력이 있었던 리스트의 뒷받침은 쇼팽의 대외적 음악 활동에 필요한 것이었다. 리스트와 멀어지면서 중요한 후원자를 잃은 쇼팽의 세계는 좁아졌다.
 
물론 쇼팽은 그 부족을 느끼지 못했다. 상드의 존재는 모든 부족분을 잊게 했다. 상드와 함께 있을 때의 쇼팽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는 성공적 연주회를 통해 분명히 드러났다. 하지만 좋은 친구를 잃은 쇼팽은 상드에 더 깊이 의존하게 된다.
 
한편 리스트와 마리 다구, 두 사람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아슬아슬 관계를 이어갔다. 서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려는 의도에서 자신이 바람피우는 것을 공개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1840년대 중반쯤에 가서 완전히 결별하게 되는데 결별 후 마리 다구는 넬리다(Nélida)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소설은 리스트를 모델로 한 듯한 젊은 예술가와 한 귀족 출신 여인의 사랑 얘기였다. 소설 속에서 그 예술가는 변변치 못한 신분 출신에 재능은 빈약한 것으로 묘사된다. 리스트는 소설을 읽었고 공개적으로는 마리의 성취에 대해 축하했지만, 속으로는 격노했다.
 
다음 이야기는 음악 인생의 정점을 달리는 쇼팽에 관한 이야기이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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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섭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필진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 한국인이 좋아하는 고전 음악가 쇼팽. 피아노 선율에 도시적 우수를 세련된 모습으로 담아낸 쇼팽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일생의 연인 상드와 다른 여러 주변 인물에 관련된 일화를 통해 낭만파시대의 여러 단면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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