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론 영향 안받고 판결할게요" 피고인에게도 다정한 판사님

중앙일보 2019.08.02 00:02 종합 16면 지면보기
백희연 사회팀 기자

백희연 사회팀 기자

“앞으로 윤씨를 피고인이라고 부를 텐데 이건 나쁜 말이 아니라 형사재판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재판부는 이름으로 부르도록 노력하겠지만, 검사나 다른 사람들이 피고인이라고 불러도 기분 나빠하지 마시고요.”
 

[취재일기]

지난달 9일 윤중천(58)씨의 첫 공판기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의 손동환 부장판사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손 판사는 “윤씨 사건이 언론에 많이 나온 사건인 걸 안다”면서도 “영향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형사재판에서는 재판부는 윤중천씨를 일단 무죄라고 추정하게 되어있으니까요”라고 손 판사가 덧붙였다. 그는 다정했다. 무거운 분위기의 형사 재판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손 판사가 친절하게 재판 절차를 설명해 준 피고인 윤씨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뇌물 혐의에 연루된 건설업자다. 반팔 수의를 입고 법정에 선 윤씨 표정에는 긴장과 불만이 섞여 있었다. 윤씨 표정만큼 윤씨측 주장도 날이 서 있었다. 변호사는 “검찰수사가 과거 군사정부 시절 간첩단 조작사건에서나 봤던 강압 수사”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김 전 차관이 아닌 윤씨에게 화살이 돌아오는 게 억울하다는 것이다.
 
이런 윤씨에게 손 판사는 상냥했다. 일반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에게 재판 절차를 설명해주는 건 판사의 의무지만, 재판을 받는 피고인의 기분까지 살뜰히 살펴주는 판사는 보기 어렵다.
 
손 판사의 다감함은 ‘유명 피고인’에게만 적용된 건 아니다. 윤씨 재판 직전 열린 한 사기 관련 재판에서는 방청석에 앉아있던 중년 여성이 갑자기 일어났다. 자신을 피해자라고 소개한 여성은 “판사님, 저는 너무 억울해요. 오늘 저 사람이 무죄를 받는다면 저는 자살할 거에요”라며 분에 차 울먹였다.
 
사기 피해자들이 법정에서 보이는 흔한 하소연.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성의 없는 대답으로 상황을 무마시킬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손 판사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고 뜻밖의 말을 건넸다.
 
“마음을 다스리는 건 본인 몫입니다.” 손 판사는 온화한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세번의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어요. 이제 시작이니 눈을 부릅뜨고 어떻게 되나 지켜보셔야죠.” 판사의 위로에 여성은 이내 자리에 앉았다.
 
“대한민국 국민은 세번의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손 판사의 말처럼 우리 국민 대부분은 재판을 한번 시작하면 3심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법원에 상고하는 사건 수가 매년 늘어나는 이유다. “끝까지 갔다”는 만족감은 있겠지만 비용이 서민들에게 유리하지만은 않다. 재판의 결과와 상관없이 기다림에 지치고 재판이 끝나고도 찜찜함을 떨쳐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많은 사람이 하급심에서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을 충분히 들어주지 않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김문현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상고 건수가 늘어나는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사실을 다투는 1·2심에서 자신의 주장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불신을 극복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수백건씩 밀려드는 재판에서 진심으로 당사자들의 얘기를 듣고 걱정해줄 수 있는 판사는 드물다. 하지만 손 판사의 재판을 지켜보며 경청이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란 생각도 든다. 당사자들의 말을 들어주는 판사, 피고인에게도 친절히 설명해주는 판사들이 많아진다면 법원에 대한 불신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백희연 사회팀 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