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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장 떠돌며 맥주 빚는 '집시 양조' 아시나요

중앙일보 2019.08.01 15:00

[더,오래] 황지혜의 방구석 맥주여행(22)

상업적인 목적으로 맥주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맥주가 유통되는 환경을 고려해 디자인하고, 대량 생산에 적합한 레시피를 짜야 한다. 사진은 맥주 양조장. [사진 pixabay]

상업적인 목적으로 맥주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맥주가 유통되는 환경을 고려해 디자인하고, 대량 생산에 적합한 레시피를 짜야 한다. 사진은 맥주 양조장. [사진 pixabay]

 
맥주 강의 요청이 들어왔다. 서울의 한 구에 거주하는 주민들이었다. 협동조합 형태로 맥주 양조장을 운영한다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양조 설비를 들여놓기 전 맥주에 대해 배우고 싶다며 지인을 통해 연락을 해왔다.
 
모두 맥주와 전혀 관계없는 직종에 종사하는 4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까지의 구성원이었다. 맥주 기초를 설명하고 일단 홈브루잉부터 해보는 게 좋겠다는 조언에 그분들은 “맥주 만드는 기계만 사면 맥주가 만들어져 나오는 것 아니냐”며 갸우뚱했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맥주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맥주를 유통될 때의 환경도 고려해 디자인하고 대량 생산에 적합한 레시피를 짜야 한다. 맥아, 홉, 효모, 물 등 맥주 재료를 기계에 투하하면 원하는 맥주가 뿅 하고 나와서 착착 포장되면 좋겠지만 그런 맥주 기계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수제 맥주 양조자들은 완성된 맥주가 20리터쯤 나오는 작은 규모로 양조(홈브루잉) 연습을 한다. 이를 통해 자신만의 레시피와 양조 노하우가 쌓였다는 확신이 들 때 비로소 양조장을 설계한다.
 
홈브루잉에서 상업 양조로 가는 길목이나 상업 양조 전반에서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집시 양조(gypsy brewing)다. 집시 양조는 이름 그대로 여러 양조장을 떠돌면서 맥주를 만드는 것이다. 자체 맥주 양조 기술을 갖고 있되 양조 설비는 다른 양조장의 것을 활용하고, 설비 사용에 따른 비용을 지급한다. 통신 설비를 보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의 통신망을 빌려 서비스를 하는 알뜰폰 업체들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집시 양조는 만드는 맥주마다 다른 양조장을 택하는 식으로 계속 이동해 다닌다.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에 자사의 상표만 붙여서 파는 맥주하고는 다르다. 사진은 크래프트 맥주 펍 '서울집시' 맥주. [사진 황지혜]

집시 양조는 만드는 맥주마다 다른 양조장을 택하는 식으로 계속 이동해 다닌다.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에 자사의 상표만 붙여서 파는 맥주하고는 다르다. 사진은 크래프트 맥주 펍 '서울집시' 맥주. [사진 황지혜]

 
집시 양조장들은 물리적인 양조장이나 맥주 제조 면허를 보유하고 있지 않지만, 시장에서는 엄연히 양조장으로 대우한다. 설비만 없을 뿐 자신들의 맥주를 상업적으로 만들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집시 양조와 비슷한 개념으로는 계약 양조(contract brewing)가 있다. 계약 양조는 기간 등을 정해놓고 정기적으로 한 양조장의 장비를 활용해 맥주를 만들지만, 집시 양조는 일반적으로 만드는 맥주마다 다른 양조장을 택하는 식으로 계속 이동해 다닌다. 계약 양조나 집시 양조는 다른 양조장이 만든 맥주에 자사의 상표만 붙여서 판매하는 맥주하고는 차별화된다.
 
집시 양조는 맥주 제조 비즈니스를 시작하려는 이들이 초기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맥주 제조 사업을 위해서는 규모나 기능, 품질에 따라 수천만 원에서 수백억 원에 이르는 양조 설비가 필요하다. 이런 투자를 섣불리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통 크게 장비를 선택해 들여놨는데 만족스럽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반대로 설비가 아무리 우수해도 양조 역량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여러 양조장을 돌아다니면서 설비를 이용해보고 확신이 생겼을 때 직접 양조 설비를 선택하고 설치한다면 이런 위험을 크게 낮출 수 있다. 이 과정은 상업 양조에 대한 제반 사항을 익힐 기회이기도 하다.
 
초기 투자비용이나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것 외에도 집시 양조에는 여러 이점이 있다. 임대료, 관리비 등 공장 운영에 따른 비용 부담이 없기 때문에 좀 더 실험적인 맥주를 만들 수 있다. 실제 집시 양조장들은 다양하고 특이한 맥주들로 이름을 알려왔다. 세금 계산, 문서 작업, 식품의약품안전처 응대 등 부가적인 업무에서 벗어나 맥주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전세계 양조장을 돌며 실험적이고 품질 높은 맥주를 만들어 이름을 알린 덴마크의 미켈러. 사진은 수제 맥주 전문 '미켈러바' 서울. [사진 Wikimedia Commons]

전세계 양조장을 돌며 실험적이고 품질 높은 맥주를 만들어 이름을 알린 덴마크의 미켈러. 사진은 수제 맥주 전문 '미켈러바' 서울. [사진 Wikimedia Commons]

 
이런 이유로 많은 양조장이 집시 양조를 택했다. 대표적으로 오랜 기간 전 세계 양조장을 돌며 실험적이면서도 품질 높은 맥주를 만들어 집시 양조 개념을 널리 알린 덴마크의 미켈러(Mikkeller)가 있다. 미켈러는 양조 설비가 없었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양조장으로 꼽혀왔고 2016년에서야 자체 양조장을 마련했다.
 
덴마크의 또 다른 성공한 집시 양조장인 이블트윈 역시 2010년 이래 여러 양조장에서 맥주를 만들다가 올해 초에서야 자체 양조장을 구축했다. 국내에서도 제주의 맥파이 브루어리, 부산의 와일드웨이브, 인천의 칼리가리 등이 집시 양조나 계약 양조 기간을 거쳐 자체 브루어리를 만들었다.
 
더쎄를라잇브루잉의 양조 장비를 이용해 여러 맥주를 내놓는 서울 을지로 끽비어컴퍼니. 집시 양조로 만든 맥주로 호평을 받는 국내 양조장 가운데 한 곳이다. [사진 황지혜]

더쎄를라잇브루잉의 양조 장비를 이용해 여러 맥주를 내놓는 서울 을지로 끽비어컴퍼니. 집시 양조로 만든 맥주로 호평을 받는 국내 양조장 가운데 한 곳이다. [사진 황지혜]

 
현재 시점에 집시 양조를 통해 만든 맥주로 호평을 받는 국내 양조장들도 있다. 서울 순라길의 서울집시는 안동맥주, 서울브루어리, 브루어리304 등과 협업해 마링고, 트위스트고제 등 완성도 높은 맥주를 선보이고 있다. 또 서울 을지로의 끽비어컴퍼니는 더쎄를라잇브루잉, 앰비션브루어리 등의 양조 장비를 이용해 여러 맥주를 소개했다.
 
집시 양조에도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일단 양조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것부터가 장벽이 될 수 있다. 또 양조 설비를 임대하는 양조장과의 신뢰가 무너진다면 모든 게 망가질 수 있다는 위험을 안고 있다. 또 계속해서 새로운 장비와 합을 맞춰 고품질의 맥주를 생산하는 것이 자체 양조장을 운영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집시 양조는 수제 맥주 업계 고유의 연대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양조 기술을 나누고 함께 발전을 꾀하는 문화적 기반이 없다면 서로 양조 설비를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불어 완성된 맥주 하나에 무게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홈브루잉으로부터 시작해 한 단계씩 성장하면서 맥주에 철학을 담아가는 과정을 인정하는 수제 맥주 소비자들의 인식도 반영돼 있다. 한마디로 집시 양조는 수제 맥주 업계의 훈훈한 한 장면이자 맥주 시장이 성숙해가는 과정이다.
 
황지혜 비플랫 대표·비어포스트 객원에디터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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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혜 황지혜 비플랫 대표·비어포스트 객원에디터 필진

[황지혜의 방구석 맥주여행]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면서 맥주는 짝으로 쌓아놓는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고 있는 맥주 덕후. 다양한 맥주를 많이 마시겠다는 사심으로 맥주 콘텐츠 기업 비플랫(Beplat)을 운영하고 있다. 전 세계의 다양한 맥주 스타일, 한국의 수제맥주, 맥주를 맛있게 즐기는 방법 등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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