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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로의 알고리즘 여행] 준비된 여행

중앙일보 2019.07.31 00:28 종합 27면 지면보기
문병로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부 교수

문병로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부 교수

부풀었던 기대와 여행지의 현실은 다르다. 좋은 풍경을 사진 찍어 SNS에 올리는 것은 여행의 불만족을 보충하기 위한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끊임없이 떠나보는 것인지 모른다. 가끔 만나는 이국의 멋진 풍경은 스마트폰으로 찍는 순간 기억 메커니즘에서 반쯤 빠져나와 저장 매체로 들어가 버린다. 나의 수용 메커니즘은 책임을 분담한 일꾼처럼 느슨해진다.
 
여행의 기대와 현장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 여행자의 준비 상태다. 준비된 만큼 보고 느낀다. 호기심, 지식, 관점이 갖추어질 때 여행은 여행다워진다.
 
준비된 여행의 대표적인 예는 독일의 알렉산더 훔볼트다. 남미 여행을 위해 적어도 3년간 철저한 준비를 했다. 자연과학 전반을 공부했고, 화산 공부를 위해 1년 반의 이탈리아 여행을 했다. 대학과 천문대를 두루 훑고 당대의 내로라 하는 동물·식물·물리·천문학자들을 찾아 배웠다. 고도계·기압계·수중계·크로노미터 등을 구입하고 측정 기술을 배웠다. 체계적 기록을 위해 그만의 기록법도 만들었다. 이런 준비 끝에 1800년에 여행을 나섰다. 여행은 당시의 가장 빠른 전달 수단인 편지를 통해 실시간으로 독일의 매체에 중계되었고, 사람들은 열광했다. 훔볼트의 남미 여행 기록은 자연지리학이란 새 분야를 태동시켰다. 남미는 그로 인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남아메리카의 발명자’라고 부른다. 훔볼트의 여행은 통상적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국 함정에 납치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열대 우림의 모기와 맹수, 늪과의 사투에 가까운 싸움이었다. 고통스런 여정이었지만 철저히 준비된 그에게는 여행이었다.
 
우리 예도 많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시리즈는 독특한 흥분을 갖춘 준비된 여행기다. 조선시대로 거슬러가면 박지원의 『열하일기』, 박제가의 『북학의』를 들 수 있다. 사신단에게는 그냥 신기한 당시의 선진국 청나라였지만 그들은 준비된 관점으로 선진국의 문명을 관찰했다. 구들이나 수레 등을 관찰하는 그들의 솜씨는 당시 조선의 상황을 감안할 때 매우 과학적이고 치밀하다.
 
알고리즘 7/31

알고리즘 7/31

여행은 물리적 공간의 이동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 만나기, 책읽기, 강연 듣기, 영화 보기, 음악 듣기, 모두가 여행이다. 필자가 가본 첫 음악회에서 유일하게 기억에 남은 건 지루함이다. 대학 1학년 때 의욕적으로 사본 철학 서적의 지루함도 잊을 수 없다. 준비되지 않은 탓이었다. 여행자로 시작했지만 관광객으로 끝났다. 어떤 연주가 누구에게는 흥분과 위안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하품 제조기가 된다. 한 권의 책이 어떤 이에게는 여행길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이 된다. 영화 ‘신의 한 수’에서 안성기가 말했다. “인생은 고수에겐 놀이터요, 하수에겐 지옥이지.”
 
알고리즘도 해답이 만드는 공간을 여행한다. 그곳에도 산이 있고, 골짜기가 있고, 거대한 고원도 있다. 우주의 은하를 연상케 하는 산들의 군집도 있다. 자신의 알고리즘이 여행하는 공간에 대한 준비와 호기심이 없는 엔지니어는 여행지를 다녀오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관광객과 같다. 공개 코드 알고리즘 하나를 구해 덜렁 공간으로 내보내면 알아서 좋은 답을 잘 찾아갈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호기심이 필요하고, 여행 중에 만날 난관을 극복할 탐험의 기술이 필요하다. 여행 준비에는 기초 공부와 시행착오의 축적이 반드시 포함된다. 이런 시간의 무게를 가벼이 생각해서는 제대로 된 여행을 하기 힘들다.
 
문병로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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