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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2월 말 조정과 성균관은 분노와 울분의 목소리로 끓어올랐습니다. 
인조의 왕비 인열왕후의 국상에 조문한다며 찾아온 청나라(당시엔 후금)의 사신 잉굴타이가 가져온 국서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엔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의 황제 등극을 동의해달라는 요구가 담겨 있었습니다. 
“오랑캐가 황제를 참칭한다”며 분노한 성균관 학생 138명은 “오랑캐 사신의 목을 베고 그 글을 불살라 대의를 밝혀야 한다”는 연명 상소를 올렸고 조정 신료 역시 “사신을 잡아다 큰길에 늘어놓고 분명하게 천하의 주멸(誅滅)을 가하소서”라며 강경한 목소리를 쏟아냈습니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삼엄한 분위기 속에 청나라 사신들은 인열왕후의 빈소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감히 오랑캐를 들일 수 없다는 여론 때문에 임시로 만든 천막에서 따로 조문하게 한 것이죠. 
이렇게 분위기가 뒤숭숭했는데 하필 이들이 조문하는 순간 바람이 불어 천막이 걷혔는데 이를 포위한 훈련도감의 포수들과 왕실 직속 금군(禁軍)이 드러났습니다. 아직도 이들이 왜 무장을 한 채 천막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신변의 위협을 느낀 청나라 사신들은 허겁지겁 도망쳤습니다. 
 
이 사건은 10개월 후 터진 병자호란의 도화선이 됐습니다. 청나라와의 외교가 끝장났다고 판단한 조선은 전쟁에 대비하라는 유시문을 내렸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이에 대비하라며 인조가 평안감사에게 보낸 편지가 하필 달아나던 잉굴타이 사신 일행의 손에 들어가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경제 갈등에서 촉발된 병자호란 
병자호란의 원인을 딱 하나로 단정하기 는 어렵습니다. 굳이 따지면 파국의 한 요인은 후금(청)의 경제적 위기였습니다.

백두산 일대, 남만주 지역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국경의 사각지대였고, 당시엔 만주족과 조선인 사이에 경제적 이권을 둘러싼 충돌이 잦았습니다. 만주 접경지역에 사는 조선인 중에는 국경을 넘어 인삼을 채취하거나 사냥을 하다가 후금(청) 측에 적발되곤 했는데 17세기 초반부터 후금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인삼

인삼

우리는 인삼을 조선 고유의 토산품이라고 확신하지만, 실제론 명나라 시장에서 조선 인삼과 만주 인삼은 경쟁 관계였습니다. 특히 농업이 뒤쳐지고 인삼, 담비 수출로 명나라에서 은과 식량을 구하던 후금으로선 인삼 사업에 사활을 걸다시피 했습니다.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도 말을 거래하던 상인 출신인데 본인도 청년 사업가로 사회에 첫 발을 디뎠습니다. 그가 30대 중반에 만주족의 지도자로 떠오른 것도 인삼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은(銀)으로 군자금을 확보한 덕분이었습니다.  
 
양국의 경제적 갈등이 본격화된 것은 1630년대 들어 이상기후로 만주지역에 기근이 확산하면서입니다. 경제 사정이 나빠진 후금은 조선인의 인삼 채취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훗날 남한산성을 포위한 홍타이지가 보낸 1차 국서에 “너희가 약소한 국력으로 우리의 변경을 소란케 하고 우리의 영역에서 인삼을 캐고 사냥을 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라는 내용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물론 이런 문제만으로 두 나라가 전면전까지 벌일 가능성은 적습니다.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은 군사·외교적 문제였습니다. 
 
후금(청)의 만주 지배에 불만을 품은 한인(漢人)들이 조선으로 넘어오면, 조선은 이들을 철산 앞바다 동강진에 군영을 차린 명나라 장수 모문룡 세력에게 넘기곤 했는데 이는 후금(청)의 큰 불만을 야기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1629년 명나라 장수 공유덕, 경중명이 해군을 이끌고 후금으로 투항할 때, 조선군이 압록강 인근에서 이들을 막아서는가 하면 1636년 4월 홍타이지가 2대 황제에 오르는 즉위식에선 조선 측 사신만 황제에게 하는 삼궤구고두례를 거부해 논란이 되는 등 양국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걷습니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외교가 사라진 자리엔 강경파만 남아 
이런 전개엔 후금(청)의 국력이 막강해진 탓도 있지만, 광해군과 인조 시대의 국정 기조에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광해군 때 집권한 북인 정권은 현실적이고 실리적 이익을 중요시하는 성향이 강했습니다. 조선 집권층으로선 이례적으로 은광 개발을 장려하는가 하면 무예를 중요시해 여타 정파들로부터 이단시 당했죠. 외교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광해군은 여론 상 불리했는데도, 명과 후금 사이의 등거리 외교를 폈고, 이는 인조반정의 한 요인이 됐습니다. 이 때문에 북인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서인 정권으로서는 강력한 후금의 국력을 알면서도 이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외교적 딜레마에 처한 상황이 된 것이죠. 
 
명분이 지배하던 조선 후기를 공부할 때면 외교관에게는 참 힘든 시기였다는 생각이 들 때가 적지 않은데, 이때가 딱 그랬습니다. 
1636년 4월, 홍타이지는 자신의 즉위식에서 절하지 않은 조선 사신(나덕헌, 이확)들을 죽이는 대신 조선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국서를 보냈습니다. 이 국서를 들고 갔다간 조정 내 강경파에게 곤욕을 치를 것이라고 걱정한 나덕헌과 이확은 국서를 귀국 길에 던져버리고 내용만 전달합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살하지 않고 돌아와 치욕적 내용을 전했다는 이유로 평안도 유배형에 처해집니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조정 안에선 강경한 척화파의 목소리가 더욱 강해졌습니다.
주화파였던 최명길은 "전쟁을 치르기 전에 일단 통역관을 보내 청나라 측 의견을 들어보자"고 했다가 "최명길의 목을 베소서"라는 상소가 빗발쳐 파직당하게 됩니다. 한 연구가는 "이때 척화파는 청나라보다 화의론자들을 더 미워하여 걸핏하면 목을 베라고 요구했다"고 적기도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인조는 홍타이지에게 경고를 담은 국서를 보냅니다.  
“우리나라는 의지할 만한 군사가 없고 충분한 재물이 없으나, 강조하는 것은 대의이고 믿는 것은 하늘뿐이다. 옛날 왜구도 우리 팔도를 함락했지만, 그 뒤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죽자 자중지란이 일어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설령 우리가 의를 지키다가 참혹한 병화를 입더라도 그 임금의 죄가 아니면, 민심은 반드시 떠나지 않고 국명도 혹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
 
반 년 뒤 홍타이지는 남한산성을 포위한 뒤 이에 대한 답장을 보냅니다. 
“너희 조선은 요, 금, 원 세 나라에 대하여 해마다 공물을 바치고 신(臣)이라 일컬었다. 너희 조선은 신하로서 북쪽을 바라보며 남을 섬겨 평안을 보전하지 않은 때가 있었단 말이냐…정묘년의 치욕을 씻는다더니 성곽과 집을 버리고 산성으로 도망쳐 들어갔다…이제 내가 대군을 이끌고 와서 너의 팔도를 무찌르려고 하는데 네가 부모처럼 섬기는 명나라가 어떻게 구해주려는지 보고 싶다. 천하에는 크고 나라들도 많은데, 왜 아무도 너를 도우려고 오지 않는가?”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유성운의 역사정치]
 
외교와 국방의 총체적 난국
외교가 바닥인 상황에서 군사력이라고 딱히 나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1624년 벌어진 이괄의 난의 후유증이 컸습니다. 함경도 북병사, 평안병사겸 부원수 등을 역임한 이괄이 인조반정의 공신 포상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이 반란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서북면 주력군이 사실상 궤멸했습니다. 이후 두려움을 느낀 서인 정권은 군사적 요충지에 역량보다는 확실한 자기 사람 심기에만 골몰해 군사력에 구멍이 난 상황이었습니다.
 
전쟁 후에도 청나라의 전략을 의도를 간파하지 못해 갈팡질팡했습니다.
청나라는 해군이 약하다고 판단해 세자와 주요 왕족들을 강화도로 피신시켰지만 앞서 말한 명나라 출신 투항장수 공유덕과 경중명의 해군이 강화도를 점령해 모두 생포됐습니다.  
또 청군의 주력이 기병이라는 점에 착안해 주요 길목의 산성에서 대기했지만, 청군은 국왕 한 명만 잡는다는 계획에 따라 이들을 모두 지나쳐버리고 전속력으로 남한산성까지 질주했습니다. 결국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는 ”팔도 근왕병은 어디쯤 왔느냐“며 의병을 애타게 찾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돌이켜보면 무인들은 전쟁 대신 외교를 추구했고, 문인들은 외교 대신 전쟁을 추구한 기묘한 시기였습니다.  
병자호란 3년 전, 청(당시엔 후금)이 정묘호란의 패배로 매년 받기로 한 예단의 품질을 문제 삼으며 명나라 군대를 칠 배를 빌려달라고 했을 때, 조선은 이를 거절하고 절교하겠다는 내용의 국서를 보냈습니다. 그때 부원수였던 정충신은 국서를 가지고 가던 사신을 국경에서 억류하는 초유의 ‘항명’을 벌였습니다. 

정충신은 10년 전 이괄의 난을 진압한 당시 조선 최고의 야전 사령관이었습니다. 그는 국경에서 후금(청)의 힘을 목도했고, 양국 갈등이 외교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결론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랑캐의 공갈이 비록 흉패하기 그지없으나 짐짓 국교를 끊는다는 뜻을 보여줘 두렵게 만들려는 것이라면, 오랑캐는 교활하므로 동요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군량은 2만명의 병사가 반 년간 먹을 양도 되지 않습니다. 오랑캐가 맹약을 어겼다고 큰소리치며 올 듯 말 듯 하다가 우리의 군사가 나태해지고 군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계속 밀고 들어온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입니까…설령 오랑캐가 섬멸되더라도 국세는 지탱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나라를 꾀하는 방법으로 볼 때 이처럼 위험한 계책을 써야 하겠습니까…국서를 약간 고쳐 그들의 뜻을 따라 주되, 회답을 본 후에 국교를 끊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대체로 세상의 일을 마음에 통쾌하게 하려고만 하면 후회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척화파의 목소리가 지배한 당시 조정에 이런 의견이 반영될 수 없었습니다.  
 
굴욕의 역사가 서린 삼전도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던 인조가 서울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석촌동)에서 청군에게 항복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굴욕의 역사가 서린 삼전도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던 인조가 서울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석촌동)에서 청군에게 항복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원인
임진왜란을 복기해보면 (병자호란과) 근본 원인이 다르지 않습니다.
임진왜란은 6년 전 위기의 신호가 있었습니다. 1586년 6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 의사를 대마도에 통보하자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던 쓰시마번은 조선 국왕을 내조(來朝)시키는 것으로 출병을 유예하면 어떻겠냐고 역제안을 해 침략을 일단 연기시켰습니다. 
 
쓰시마번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조선은 우여곡절 끝에 1590년 동인의 김성일과 서인의 황윤길을 보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접견한 이들이 내놓은 분석은 달랐습니다.
황윤길은 “필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했고 김성일은 “그러한 정황은 없었다. 황윤길이 인심을 동요시킨다”고 반박했죠. 훗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김성일의 발언이 ‘여론 동요’를 우려한 것이라며 옹호했지만 김성일은 전쟁에 대비한 축성에도 부정적이었습니다. 당시 분위기는 야당인 서인 측이 전쟁 위험을 경고하고, 여당인 동인 측은 ‘과도하다’고 꾸짖는 식이었습니다. 
 
결국 임진왜란 발발 한 달 만에 한양을 내준 조선은 전국 각지의 의병과 이순신의 분전 등에 힘입어 간신히 사직을 보존하게 됩니다. 정치인들이 대비하지 못해 임진왜란을 당하고도 40년 뒤 병자호란을 겪게 된 것을 보면 역사로부터 배운 게 없었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수백 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요.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최근 한·일 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는 가운데 비판이나 다른 견해를 묵살하려는 분위기는 여전합니다. 청와대 조국 전 민정수석은 얼마 전 한·일 갈등을 놓고 다른 목소리를 내면 '이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볼까요. 임진왜란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건 당시 조정 안에 친일파가 있어서일까요? 경고를 무시해서였을까요? 
또, 병자호란 때 속수무책 당한 건 조선에 친청파가 득세해서였나요? 되려 모두가 듣고 싶은 목소리만 쫓아가다가 방비에 소홀해 화를 키운 것이 비극의 원인이었습니다.
 
어떤 정치인들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내일은 없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교훈은 무엇인가요.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는 외부 침입으로부터의 방비입니다. 세금을 걷고 지도자에게 국정을 맡기는 이유입니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조선은 이를 소홀히 하다가 위기가 닥치자 관군은 쉽게 무너졌고, 군주는 의병을 찾는 무능한 모습이 반복됐습니다. 이런 과정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것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교훈이 아닐까요. 그런데 작금의 상황을 부끄러워해야 할 정치인들이 당당하게 의병과 죽창가를 찾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기까지 합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계승범『같은 전쟁 다른 기록 병자호란(1637) 중 오간 국서 기록의 상이함과 그 동아시아적 의미』, 장한식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 허태구『병자호란 강화 협상의 추이와 조선의 대응』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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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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