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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이 내팽개친 훈민정음, 그 중 해례본 상주본 있었나

중앙일보 2019.07.27 10:00
세종대왕과 주변 인물들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다룬 사극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세종대왕과 주변 인물들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다룬 사극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내 마지막 부탁이다. 이 책만은 너희 서가에서 썩지 않고 널리 전파될 수 있도록 도와다오.”

 
25일 개봉한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의 한 장면이다. 세종(송강호)이 비밀리에 완성한 훈민정음을 책자로 만들어 신하들에게 배포하면서 ‘언문’이 널리 쓰일 수 있게 당부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신료들은 그대로 어전을 박차고 나간다. 유일하게 세종을 변호하는 고약해(정해균)만이 한권 챙길 뿐이다. 카메라는 덩그러니 남은 책자들을 씁쓸하게 비춘다.  

[강혜란의 사소한 발견] 영화 '나랏말싸미'와 훈민정음 수난사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완성된 훈민정음 해례본을 들고 세종(송강호)에게 고하는 집현전 학사 정인지(최덕문). 제작진은 현존하는 간송본과 최대한 비슷하게 소품을 제작해 신료들에게 나눠주는 장면을 찍었다. [사진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완성된 훈민정음 해례본을 들고 세종(송강호)에게 고하는 집현전 학사 정인지(최덕문). 제작진은 현존하는 간송본과 최대한 비슷하게 소품을 제작해 신료들에게 나눠주는 장면을 찍었다. [사진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썩지 않고 널리 전파될 수 있게 도와다오"

잠깐, 그렇다면 저 책자가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 ‘사소한 발견’이 포착한 이 장면에 대해 영화사 두둥 측은 설정상 “맞다”고 확인해줬다. 영화에선 해례본이라는 언급이 없지만 제작진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간송본에 맞춰 크기(23.3㎝X16.8㎝)와 서체를 정했다. 다만 겉표지 색깔은 조철현 감독과 류성희 미술감독이 현대 감각에 맞게 변형했다고 한다.  
 
영화 속 장면엔 소품이 약 50여권 쓰였다. 실제로 세종이 해례본을 몇 부 찍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다만 1447년 한글로 엮은 최초의 책인 『용비어천가』를 550질 나눠줬다는 기록으로 봐서 최소 500부는 됐을 거라는 관측이 나온다.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소품으로 제작된 훈민정음 해례본. 현존하는 간송본과 크기는 같고 표지 디자인은 현대적 감각으로 변형했다. [사진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소품으로 제작된 훈민정음 해례본. 현존하는 간송본과 크기는 같고 표지 디자인은 현대적 감각으로 변형했다. [사진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당연한 말이지만 훈민정음 사용설명서인 해례본은 한글이 아닌 한자로 쓰였다. ‘해례(解例)’란 자세히 풀어쓰고 예를 들어 설명한다는 뜻으로 이 책을 집필한 목적이기도 했다. 영화에서 세종은 조력자인 신미 스님(박해일)과 함께 창제한 훈민정음을 정인지(최덕문)에게 보여주며 “앞 서문은 내가 쓸테니 뒷 서문은 네가 써라”라고 말한다.  
 
실제로 해례본은 세종이 직접 쓴 예의(例義)편과 해례, 정인지 서문 등 3부분 33장(66쪽)으로 돼 있다.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고 한 게 예의 편이다. 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예의본 완성 후 2년 6개월간 해설하는 작업을 했고 이 해례를 책임 집필한 게 정인지·박팽년·신숙주·성삼문·최항·강희안·이개·이선로 등 집현전 학사들이다. 맨 마지막에 실린 정인지 서문은 발간일을 1446년 9월 상순으로 명시하고 있어 훗날 ‘한글날’ 제정 때 기준이 됐다.
 
영화 속에서 신하들이 외면하고 떠난 자리에 널브러진 수십권. 최근 세간을 시끄럽게 했던 소위 ‘상주본’도 그 중 한권일 수 있다. ‘저 널브러진 책자 하나만 갖고 올 수 있다면, 그깟 상태도 확인 안되는 상주본에 연연하지 않을텐데’ 하고 아쉬움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한자 권력 흔들릴까…집현전 학사조차 '한글' 외면 

그렇다면 다시 드는 의문. 그 많던 해례본은 다 어디로 갔을까.  
 
훈민정음 해례본 [중앙포토]

훈민정음 해례본 [중앙포토]

“양반 사대부들이 정음을 지독히 싫어했으니까요. 아마 보존할 생각도 안했을 겁니다.”

 
훈민정음(한글)의 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김슬옹 세종 국어문화원 원장(문학‧국어교육학 박사)의 말이다. 임금이 내려준 하사품을 차마 거부하진 않았어도. 받은 해례본을 연구하긴커녕 소홀히 다뤄 소실됐을 가능성이 크단 얘기다.
 
양반들은 왜 그렇게 훈민정음을 싫어한 걸까. ‘나랏말싸미’의 다음 대사를 보자.
 
세종 : 문자를 새로 만드는 일은 내 능력을 넘어서는 것 같소.
소헌왕후 : 똑똑한 신하들 놔두고 왜 혼자서만 애달캐달하세요?    
세종 : 새 문자를 만들자고 하면 가장 극렬하게 반대할 자들이 바로 그 신하라는 작자들이오.그들이 대대손손 권력과 신분을 유지하는 무기가 한자고 한문인데 그 알량한 기득권을 포기할 것 같아?!    
 
세종 말처럼 스물 여덟자로 누구나 쉽게 읽고 쓸 수 있게 되면 하층민도 지식 생산‧교류에 참여할 수 있을 터였다. 한자 지식 권력이 떠받치는 양반 신분제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단 얘기다. 이 때문인지 김슬옹 원장에 따르면 해례본을 공동 집필한 집현전 학사들은 물론 우리가 익히 아는 실학자 정약용‧박지원‧박제가 등도 한글 기록을 일절 남기지 않았다. 반면 실록에 언문으로 된 상소가 종종 등장하는 데서 보이듯 백성들 사이에선 차츰차츰 한글이 퍼져나갔다.  
 

#기와집 열채 값에 해례본 구한 간송, 잘 때 베고 자 

경복궁 앞 광화문 광장에 2009년 들어선 세종대왕 동상이 왼손에 들고 있는 게 해례본이다. 이런 모습도 간송본이 전승되지 않았다면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실록에 언급만 됐을 뿐 실물이 한번도 확인되지 않았던 해례본이 처음으로 발견된 건 일제강점기였던 1940년. 경북 안동의 서예가 이용준이 집안 가보 중에 훈민정음이 있다는 걸 학자 김태준에게 알리면서다. 이 소식은 당시 사재를 털어 우리 문화재를 수집 중이던 간송 전형필(1906~1962) 귀에 들어갔다.
생전의 간송 전형필. 그가 사재를 털어 수집한 문화유산은 광복 후 12점이 국보로, 10점이 보물로, 4점이 서울시 지정 문화재로 인정받았다. 그중 으뜸이 국보 제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사진 간송미술관]

생전의 간송 전형필. 그가 사재를 털어 수집한 문화유산은 광복 후 12점이 국보로, 10점이 보물로, 4점이 서울시 지정 문화재로 인정받았다. 그중 으뜸이 국보 제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사진 간송미술관]

 
다음은 이충렬이 쓴 평전 『간송 전형필』(김영사, 2010)에 나오는 대화문 발췌 요약.
 
전형필: 소유주가 얼마를 말씀하셨소?
김태준:(심호흡을 하며) 값이 좀 셉니다. 천원을 달랍니다.(천원=기와집 한 채 값)
전형필: (미소 지으며) 천태산인, 그런 귀한 보물의 가치는 집 한 채가 아니라 열채라도 부족하오. (중략) 천태산인께 드리는 사례로 천원을 준비했소.『훈민정음』 값으로는 만원을 쳤습니다. 이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요.
 
이렇게 수중에 넣은 해례본을 간송은 밤새 읽고 또 읽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간송은 해례본을 자신이 수장한 문화유산 중 최고의 보물로 여겨 한국전쟁 중 피난 갈 땐 품속에 품었고, 잘 때 베개 속에 넣고 잤다. 이렇게 보존된 해례본은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됐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글의 명확한 창제원리와 문자를 조합해 표기하는 방법까지 자세하게 설명한 해례본의 존재가 우리 문화와 학계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이 세척 작업 중이다. 왼손에 들린 게 훈민정음 해례본. [뉴스1]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이 세척 작업 중이다. 왼손에 들린 게 훈민정음 해례본. [뉴스1]

세상에 단 한권, 간송본만 존재하는 걸로 여겨졌던 해례본. 그런데 2008년 또한번의 기적이 벌어졌다. 경북 상주에 사는 고서적 수집가 배익기씨가 집 수리 과정에서 발견했다며 해례본을 방송에서 공개한 것이다. 이른바 ‘상주본’의 등장이다. 그런데 방송 이후 골동품 판매업자인 조모씨가 “배씨가 훔쳐간 것”이라며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기나긴 법정 공방이 이어졌다.
 

#소재 묘연한 상주본, 훗날 역사 어떻게 기록할까

최종적으로 지난 11일 대법원은 상주본의 소유권이 배씨에게 있지 않다고 원심 확정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조씨가 생전 소유권을 넘겼던 문화재청이 상주본 회수 강제 집행에 나설 길이 열렸다. 하지만 배씨는 여전히 자신이 소유주임을 주장하며 상주본을 숨긴 위치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2015년 3월 배씨 집 화재 당시 일부 훼손된 상주본의 상태가 어떤지 아는 이는 오로지 본인뿐이다. 배씨는 한때 "1조원 가치의 10분의 1인 1000억원"을 사례금으로 요구하기도 했지만 이젠 아예 문화재청 접촉에 응하지도 않는다. 가장 우려되는 건 소재가 밝혀지지 않는 상태에서 배씨 신변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다. 간송본과 비교해 행여나 또다른 역사적 사실을 밝혀줄 지 모를 상주본이 영영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2008년 존재가 알려졌다가 소유권을 둘러싼 법정 공방에 휘말리면서 모습을 감췄던 훈민정음 상주본. 2015년 3월 배익기씨 집에 불이 났을 당시 일부 탄 상태로 2017년 배씨에 의해 공개됐다. [연합뉴스]

2008년 존재가 알려졌다가 소유권을 둘러싼 법정 공방에 휘말리면서 모습을 감췄던 훈민정음 상주본. 2015년 3월 배익기씨 집에 불이 났을 당시 일부 탄 상태로 2017년 배씨에 의해 공개됐다. [연합뉴스]

 
다시 영화 속 장면을 생각해본다. 신하들이 외면하고 떠난 자리에 널브러진 수십권 중에 간송본도, 상주본도 있었을 것이다. 조씨 주장대로 배씨가 몰래 훔쳐갔을 수도 있고, 배씨 입장에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보물을 국가에 뺏길 처지일 수 있다. 다만 영화 속에서 세종대왕이 "서가에서 썩지 않고 널리 전파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던 마음, 그리고 큰 재산을 헐어 해례본을 구입하고 지켰던 간송의 바람을 떠올려본다. 상주본의 ‘원래 소유권’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사소한 발견(사발)
문화 콘텐츠에서 사소한 발견을 통해 흥미로운 유래와 역사, 관련 정보를 캐고 담는 '사발'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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