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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아폴로 11호 50주년 교훈-미국, 나치 전력 따지지 않고 과학기술자 우대했더니

중앙일보 2019.07.27 05:00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미국 유인우주선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의 배경에는 미국과 소련의 과학기술 확보 열망과 필사적인 과학기술자 유치 경쟁이 자리 잡고 있다. 흔히 미국과 소련의 우주 경쟁은 1957년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따져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에 이미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국은 ‘페이퍼클립 작전’을, 소련은 ‘오소아비아힘 작전’이란 이름으로 각각 독일의 로켓 기술자를 경쟁적으로 자국으로 데려간 것이 바로 그것이다. 독일이 전쟁 중 개발한 로켓 기술을 흡수하기 위해서다.  

소련 인공위성, 미국 달 착륙 경쟁
그 뒤엔 과학기술 인재 확보 전쟁
독일, 43년 V-2 로켓으로 영국 공격
종전 뒤 미, 독일 기술자 1600명 이송
나치 전력 폰브라운에 로켓 개발 맡겨
소련, 기술자 2200명 데려가 로켓 개발
ICBM과 세계 첫 인공위성 기술 확보
외국 과학자 불신, 일정 기간 뒤 귀국
미, 장학금·연구비 전 세계 인재 모아
확보 기술, 계속 활용해야 수준 유지

76년 전인 1943년 독일 북부 페네뮌데 로켓 연구소에서 발사되는 V-2 로켓.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미국과 소련은 이 연구소의 과학기술자를 확보해 로켓 기술을 흡수하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로켓 기술은 우주발사체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사용됐다.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76년 전인 1943년 독일 북부 페네뮌데 로켓 연구소에서 발사되는 V-2 로켓.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미국과 소련은 이 연구소의 과학기술자를 확보해 로켓 기술을 흡수하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로켓 기술은 우주발사체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사용됐다.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미소, 2차대전 직후 과학기술자 확보에 혈안

‘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라는 법구경 구절은 로켓에도 적용된다. 같은 로켓이라도 재래식 폭탄이나 핵탄두를 실어 날리면 무기체계인 미사일이 되지만, 인공위성을 실어 쏘면 우주 발사체가 되니까 말이다.  
로켓은 처음엔 전쟁 도구로 개발됐다. 그 계기는 1943년 2월 독일군의 처절한 패배로 끝난 스탈린그라드 전투다. 나치 정권은 이 패전으로 초조해졌다. 한정된 경제력·자원을 동원해 기존 군수산업을 아무리 가동해도 연합군을 누르기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것이다. 재래식 무기체계와 병력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보고 대신 ‘비대칭 전술’ 마련에 몰두했다. 과학기술을 활용해 연합군에겐 없는 비밀무기를 개발해 필살의 일격을 가한다는 전략이다. 일종의 ‘반칙왕’ 같은 전술이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전반적인 경제력과 기술력이 뒤처져 재래식 무기체계를 충분히 개발하거나 제작하지 못하니까 핵과 미사일이라는 비(非)재래식 무기체계에 눈을 돌려 비대칭 전략을 본격적으로 추구했다.  
미국 우주 개발의 초기인 1962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 발사작전센터(나중에 케네디 우주센터로 이름이 바뀜)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쿠어트 데부스 소장, 린든 존슨 부통령(오른족부터)이 보고를 받고 있다. 데부스 박사는 나치 로켓 과학자 출신으로 미국이 독일의 로켓 과학기술자를 이주시키는 페이퍼클립 작전에 의해 1962년 미국으로 옮겨 소장을 맡았다. [사진 NASA]

미국 우주 개발의 초기인 1962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 발사작전센터(나중에 케네디 우주센터로 이름이 바뀜)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쿠어트 데부스 소장, 린든 존슨 부통령(오른족부터)이 보고를 받고 있다. 데부스 박사는 나치 로켓 과학자 출신으로 미국이 독일의 로켓 과학기술자를 이주시키는 페이퍼클립 작전에 의해 1962년 미국으로 옮겨 소장을 맡았다. [사진 NASA]

 

런던에 쏘던 V-2 로켓으로 뉴욕 공격도 연구

나치 정권은 1943년 초 군 복무 중이던 과학기술자 4000여 명을 차출해 독일 북부 발트해 연안 페네뮌데의 과학기술 연구센터에서 로켓의 무기화 연구에 투입했다. 군에 징병돼 장교 당번병으로 일하던 물리학자, 군용 제빵공장에서 빵을 굽던 수학자, 수송 트럭을 몰던 정밀기계 공학자들이 다시 연구개발 업무에 복귀했다. 이들은 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1912~77년)의 주도로 개발한 사거리 320㎞의 V-2(Vergeltungswaffe-2·보복무기 2호) 로켓의 전력화 작업에 종사했다. V-2는 세계 최초 장거리 유도 탄도미사일이다. 폰 브라운은 1932년부터 군에서 로켓을 연구했다. 1944년 6월 20일에는 페네뮌데에서 V2 로켓을 수직으로 발사해 176㎞ 상공까지 보내면서 우주 탐사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를 2단 로켓으로 만들어 미국 뉴욕을 공격하는 방안까지 연구했다.  
나치 정권은 독일 중부 노르트하우젠의 로켓 공장에서 종전까지 5200기의 V2를 생산해 대부분을 영국·벨기에·프랑스의 연합군과 민간인 시설을 공격하는 데 썼다. 특히 1944년 9월부터 3000기 이상의 V-2 로켓을 영국을 향해 집중적으로 발사해 9000명 이상의 군인과 민간인을 살해했다, 하지만 몇몇 비대칭 무기만으로는 전세를 뒤집기에 역부족이었다.  
나치가 V-2 로켓을 개발한 독일 북부 페네뮌데 로켓 연구소는 이제 유럽의 산업문화 유적으로 지정돼 보호 받고 있다. 견학시설로 본신한 연구소 자리에 설치된 V-2 로켓의 모습. [위키피디아]

나치가 V-2 로켓을 개발한 독일 북부 페네뮌데 로켓 연구소는 이제 유럽의 산업문화 유적으로 지정돼 보호 받고 있다. 견학시설로 본신한 연구소 자리에 설치된 V-2 로켓의 모습. [위키피디아]

 

페네뮌데 나치 로켓연구소, 산업문화 유적으로  

첩보 활동을 통해 페네뮌데 연구소의 정체를 파악했던 영국과 미국, 그리고 소련은 전쟁 중에는 이곳을 폭격해 파괴하려고 시도했으며, 종전 직전에는 이곳을 먼저 점령하려고 애썼다. 1945년 2월까지 미사일을 연구하던 페네뮌데의 과학기술자들은 소련군이 진격해 옴에 따라 관련 장비와 시설을 뜯어 그해 3월 중순까지 오스트리아 등지로 옮겼다. 소련군은 그해 5월 페네뮌데를 점령했지만, 텅 빈 시설만 발견했을 뿐이다.  폰 브라운은 오스트리아에서 미군에게 항복했다. 
페네뮌데 연구소 자리에는 1992년 역사기술정보센터가 들어서 견학 장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곳에서 개발된 V2 로켓과 무인 폭격기는 센터의 인기 전시품이다. ‘유럽 산업문화유산의 길(European Route of Industrial Heritage[ERIH])’에도 등재돼 ‘에너지·교통수단·통신 분야’의 산업 역사 유적으로 보호 받고 있다.  
나치가 세운 페네뮌데 로켓 연구소에서 일하다 종전 뒤 페이퍼클립 작전에 의해 미국 텍사스주로 이주한 104명의 독일인 과학기술자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들은 미국의 우주개발을 이끌었다. [위키피디아]

나치가 세운 페네뮌데 로켓 연구소에서 일하다 종전 뒤 페이퍼클립 작전에 의해 미국 텍사스주로 이주한 104명의 독일인 과학기술자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들은 미국의 우주개발을 이끌었다. [위키피디아]

 

미국행 독일 로켓 과학자들, NASA 창설 기여

전쟁 말기 독일 군사연구협회 직원이던 베르너 오젠베르크는 페네뮌데에서 근무하는 과학기술자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오젠베르크 리스트’로 불리는 이 문서는 종전 직전 독일 서부를 점령한 연합군에 의해 본 대학의 한 화장실에서 발견됐다. 1945년 5월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국은 이 명부를 바탕으로 독일의 로켓 과학기술자들을 줄줄이 모셔오는 ‘페이퍼클립 작전’을 수행했다.  
‘로켓의 아버지’로 불리는 폰 브라운 박사를 비롯한 로켓 과학자 127명이 1945년 6월 1진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에 입국했다. 종전된 지 불과 한 달 만이었다. 7명의 합성연료 기술자와 86명의 항공기술자가 뒤를 이었다. 전쟁 내내 연합군을 골치 아프게 했던 독일의 암호·통신 전문가 24명도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들은 처음엔 ‘전쟁부의 특별 고용자’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포로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1년 계약직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괜찮은 보수와 과학기술자에 대한 높은 대우 앞에 대부분 미국에 귀화해 현지에 정착했다. ‘독일 로켓의 아버지’인 폰 브라운 박사와 동료들도 여기에 포함됐다. 폰 브라운 박사는 1937년 나치당원이 됐으며, 나치 친위대(SS) 대위로서 로켓 개발 작업을 지휘했다. 미국은 폰 브라운의 이런 나치 전력을 문제 삼지 않고 그에게 로켓 기술 이전과 새로운 개발 작업을 맡겼으며 1955년 시민권을 부여했다. 폰 브라운뿐 아니라 당시 미국에 건너온 독일 로켓 과학자의 상당수는 나치 전력이 있었으며, 일부는 나치 간부였다. 나치 시절 협력하지 않은 유력 독일인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은 과거 전력은 불문에 붙였으며, 이들은 과학기술 연구로 새로운 조국인 미국에 충성했다.       
폰 브라운과 동료들은 미국의 대륙간탄도탄(ICBM) 개발과 우주탐사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소련이 1957년 10월 4일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자 미국은 항공우주국(NASA)을 창설하며 대응에 나섰는데 이들 상당수는 NASA 창설 멤버로 참여했다.  
미국은 1946년부터 1990년까지 1600여 명의 독일 로켓 과학기술자를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로켓은 물론 제트기·통신·암호·합성연료 등 다양한 분야의 과학기술을 흡수했다. 여기서 얻은 신기술 특허와 아이디어는 당시 환율로 100억 달러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케네디 우주센터에 전시된 에 새턴 5호 로켓과 설명 표지판. [중앙포토]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케네디 우주센터에 전시된 에 새턴 5호 로켓과 설명 표지판. [중앙포토]

소련, 독일 기술로 ICBM·우주발사체 개발

소련도 1946년부터 ‘오소아비아힘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2200여 명의 독일 과학기술자와 가족까지 6000여 명을 소련으로 데려갔다. 이를 통해 각종 군사 기술을 얻어냈다. 폰 브라운의 조수였던 헬무트 그뢰트루프를 비롯한 250명의 로켓 기술자도 소련으로 이송됐다. 페네뮌데 연구소 인력의 상당수는 미국이 차지했지만, 로켓 공장 근무자들은 소련이 데려갔다. 소련은 공장을 통째로 뜯어가 스탈린그라드 동남쪽 카푸스틴 야르에 로켓 연구소를 세웠다. 그뢰트루프는 여기서 소련 과학자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함께  V-2 로켓을 복제해 소련 최초의 로켓 R-1을 만들었다. 미국과 소련의 우주 로켓과 미사일은 결국 독일 V-2 로켓의 복제에서 시작된 셈이다. 기술 이전이나 복제는 오랫동안 축적된 타국의 과학기술을 가장 효과적으로 습득하는 방법이다. 지금은 지적 재산권에 따른 비용을 지불하는 게 규범이 됐지만, 당시는 그런 게 없었다.  
소련이 이렇게 개발한 R-1 로켓은 소련 핵미사일과 우주 개발의 바탕이 됐다. 코롤료프가 이를 바탕으로 57년 5월 세계 최초로 발사한 ICBM의 발사체로 쓴 R-7 로켓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R-7은 그해 10월 4일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우주 공간에 쏘아 올리는 데도 사용됐다. 여기서 시작된 미·소 간의 우주 경쟁은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으로 일단락됐지만, 양국의 우주 과학기술 경쟁은 1991년 소련 몰락까지 계속됐다.  
소련이 첫 개발한 R-1 로켓. 독일의 V-2 로켓을 복제해 만든 것으로 알려졌는데, 외형도 흡사하다. [위키피디아]

소련이 첫 개발한 R-1 로켓. 독일의 V-2 로켓을 복제해 만든 것으로 알려졌는데, 외형도 흡사하다. [위키피디아]

 

축적한 과학기술을 경제에 활용 못 한 소련  

독일 로켓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소련은 미국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미국은 독일 과학기술자들을 아예 자국민으로 받아들였을 정도로 인재 확보에 열린 자세를 보였다.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자 만회에 나선 미국은 장학금과 연구비를 주며 전 세계의 과학기술 인재를 자국으로 모았다. 인종이나 국적, 배경을 보지 않고 오로지 실력과 능력만 보며 과학기술 인재 확보에 나섰다.  
소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소련은 외국 출신에 대한 의심이 많았다. 러시아 혁명 이후엔 서구의 강대국들이 반혁명 세력을 규합해 소련을 무너뜨리려 한다고 선전했다. 외국과 외국인, 더 나아가 자국 내의 소수계에 대한 배척과 증오는 경직된 전체주의 사회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과거 히틀러의 나치 체제가 유대인을 배척하고 증오하면서 절멸 대상으로 삼은 것과 같은 논리다. 인간의 가치나 능력보다 이념과 충성심을 중시하는 공산 사회라는 것이 그 배경으로 보인다. 실질보다 이념을 앞세운 체제의 한계다.  
 

축적한 과학기술은 계속 활용해야 수준 유지

이런 공산 소련은 주요 프로젝트를 외국이나 외국에 맡기거나 국제 분업에 의존하려고 하지 않고 모두 국산화하려고 애썼다. 그 결과는 형편없이 낮은 효율성이었다. 소련이 과학기술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도 산업 효율이 떨어져 경제가 파탄 나고 물자가 부족해 체제 몰락으로 이어진 주요 이유다.  
소련은 데려간 독일 과학기술자로부터 기술 흡수를 어느 정도 끝내자 1951년까지 이들은 귀국시켰다. 중요한 것은 1년 정도 아무 일도 맡기지 않고 놀려서 최신 과학기술 정보에서 멀어지게 한 다음에 돌려보냈다는 사실이다. 어떤 과학기술이든 일정 기간 활용과 업그레이드를 하지 않으면 용도가 떨어지게 마련이라는 점을 잘 알기에 이런 조치를 했을 것이다. 한국이 경제성장 과정에서 축적한 반도체·전자·원자력·자동차·조선·화학 기술을 지금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를 되새겨볼 때다. 아폴로 11호 달 착륙 50주년을 맞아 미국과 소련의 과학기술과 관련 인재 확보 경쟁을 살펴보면서 얻은 교훈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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