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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전자 조작해 만든 ‘완벽한 연인’과 사랑하게 될 수도

중앙선데이 2019.07.27 00:02 646호 18면 지면보기

김대식의 ‘미래 Big Questions’<1> 사랑의 미래는?

조르조 데 키리코,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조르조 데 키리코,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눈물의 씨앗”이라고 누군가 노래했던 ‘사랑’. 노래에서만이 아니다. 전설, 신화, 문학, 예술 …
 

SF 영화처럼 기계와 사랑하면
희생 않고 순종 명령할 수 있어
수백년 전 인물과 ‘가상 연애’ 등
완전히 새로운 사랑 이뤄질 것

먼 미래에 만약 외계인이 (또는 지구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있을 인공지능이) ‘고대’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연구한다면, 반드시 질문할 듯하다.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목숨을 바치고,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10년간 전쟁을 했다는 걸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분석하고 정의 내리려 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한번 물어보자. 사랑이 도대체 무어냐고?
 
소크라테스 전 철학자이자 존재철학의 대가인 파르메니데스는 주장했다: 존재에 대한 핵심 질문은 언제나 “하나인지 아니면 여러 가지인지”를 구별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리스 고대 철학가들은 아마 대답했을 것이다. 사랑은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가지라고. 우선 지혜를 사랑한다는 의미의 필로소피아(philosophia, 철학)에서 잘 알려진 지적 사랑 ‘필리아(philia)’와 성적 욕구를 가진 ‘에로스(eros)’를 구별할 수 있다. 그게 다는 아니다. 방탄소년단의 ‘Love Yourself’에서 핵심인 자신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필라우티아(philautia)’, 그리고 ‘스토르게(storge)’라 불리던 가족 간의 사랑을 구별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사랑 ‘필라우티아’는 운명
 
이들은 정말 모두 서로 다른 사랑을 의미하는 걸까? 아닐 수도 있겠다.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타고났기에, 나 자신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보호하려는 것은 당연하겠다. 아니, 나를 사랑하기에 나를 보호한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행동과 본능을 좌우하는 이기적 유전자들의 유일한 목표인 생존을 위해 우리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프로그램되어있는지도 모른다. 필라우티아는 선택이 아닌 운명이다.  
 
하지만 자연은 우리에게 관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기 위해 최적화된 단백질 로봇일 뿐이다. 키 크고, 잘생기고, 돈 많고 … 훌륭한 조건을 통해 에로스적 매력을 키우면 역시 멋진 파트너를 만날 확률이 높아진다. 결국 에로스는 목적, 필라우티아는 도구인 셈이다. 그렇다면 스토르게, 가족들 간의 사랑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기적 유전자는 모든 유전자의 합집합인 ‘게놈’이 아닌 개별 유전자 간의 생존 경쟁을 의미한다. 유전자 100% 모두가 다음 세대까지 살아남기는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유전자 50%를 공유한 자식과 형제를 사랑한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동시에 가족들이 가진 나와 비슷한 유전자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일이 하나 벌어진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확장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타인의 유전자를 관찰할 수 없다. 적어도 유전자 분석 기술이 20세기에 발명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냥과 채집을 하며 20~30명 대가족이 함께 생활하던 신석기시대까지는 문제 되지 않았다. 나와 같이 생활하는 이들이 바로 나의 유전적 가족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농업을 시작하며 도시를 세우고 이제 수천, 수만, 수백만 명과 함께 살아야 하는 호모 사피엔스. 그들 중 누가 사랑하고 지켜주어야 할 ‘가족’이고, 누가 기회만 되면 나를 해치고 죽이려 하는 ‘적’일까?
 
연못에 비친 자신 모습에 사랑에 빠졌다는 나르키소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에코와 나르키소스’.

연못에 비친 자신 모습에 사랑에 빠졌다는 나르키소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에코와 나르키소스’.

내면적 유전자는 직접 관찰할 수 없으니 뇌는 스스로 가장 잘하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바로 세상을 보고, 듣고, 만져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다. 같은 것과 다른 것을 식별하는 능력. 기준은 언제나 똑같았다. 나 그리고 나와 함께 자란 식구들을 벤치마킹하면 되겠다. 비슷한 피부색과 얼굴과 억양을 가진 사람은 나와 비슷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반대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들은 유전적 이방인이기에 언제나 차별하고 전멸시켜야 할 대상이겠다. 가족,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인 스토르게는 동시에 언제나 민족주의와 인종차별의 가능성을 암시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필리아’, 지적인 사랑 역시 이기적 유전자를 기반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여기선 문제가 생긴다. 셰익스피어를 사랑하고 철학적 논쟁을 벌이고 밤하늘 별들을 바라보며 우주와 인류의 기원에 대해 고민하는 그런 행동들이 과연 이기적 유전자에 어떤 이득을 줄 수 있을까? 아니 반대로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삶과 우주를 탐구하며 자연스럽게 느낄 수밖에 없는 인생의 무의미와 괴로움. 내 동의도 없이 태어난 세상에서 겪어야 하는 수많은 좌절과 불행. 어차피 의미도 목적도 없다면 왜 나는 계속 존재해야 할까? 왜 나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켜 ‘삶’이라는 불행을 끝없이 반복시켜야 할까? 차라리 지금 이 순간 죽어버리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무한의 생존만을 “원하는” 이기적 유전자들엔 진정으로 위험한 질문들이겠다.  
 
하지만 이 위험한 질문들은 동시에 인류 문명과 예술과 과학의 기원이 되었다. 우리가 더는 유전자들의 이기적인 명령에 절대복종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수백만 종의 지구 생명체 중 유일하게 자연의 쇠사슬에서 풀려난 인류. 무한으로 돌고 도는 이기적 유전자가 만들어놓은 자연의 바퀴에서 해방된 우리는 어쩌면 - 적어도 생물학적인 차원에선 - 이미 불교적 깨달음과 철학적 진리를 달성했는지도 모르겠다.  
 
생물학적 에로스와 필라우티아와 스토르게를 넘어 문명적 필리아적 사랑에까지 도달한 인류. 그렇다면 미래 인류의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한번 상상해보자. 먼저 인간과 기계의 사랑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녀(Her)’, ‘엑스 마키나’, ‘웨스트월드’. 인간과 기계의 사랑은 최근 공상과학 영화계의 단골 주제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왜 우리는 기계와의 사랑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인간과 인간 사이 사랑은 언제나 자유와 외로움 간의 불완전한 타협이다. 혼자인 인간은 가장 자유롭지만, 동시에 가장 외롭기도 하다. 타인과 사랑을 하고 인생을 공유한다는 것은 무한의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더는 외롭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보장받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이상적인 꿈과는 거리가 멀기에, 대부분 사랑은 한 사람의 포기와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만약 내 사랑의 상대가 기계라면? 더는 외롭지 않은 나는 동시에 본능적 필라우티아까지 즐기면서도 상대방에겐 복종과 순종을 명령할 수 있다. 너무나도 이기적인 방법이지만, 상대방이 기계라면 “이기적”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 내가 원할 때 차를 모는 나의 행동이 내 차에게 이기적일 수 없듯 말이다.
  
다른 존재로 둔갑한 자아의 사랑도 가능
 
가상 현실과 증강현실의 발전은 다른 형태의 사랑 역시 가능하게 한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둔갑한 자아의 사랑.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의 사랑. 더는 살아있지 않는 수백 년 전 역사적 인물과의 사랑. 이미 떠난 옛 애인을 포기할 수 없기에 인터넷에 남은 정보들을 수집해 가상현실에서 나누는 스토커들의 사랑. 주변 모든 이들의 얼굴을 내가 꿈꾸는 아이돌 스타의 얼굴로 바꾼 증강현실에서의 사랑.  
 
사랑이라는 “토끼 굴”은 도대체 얼마나 깊은 걸까? ‘유전자 가위’ 같은 최첨단 기술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더 다양한 차원의 사랑 역시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내 유전자를 조작해 만든 나와 완벽하게 잘 어울리는 연인과의 사랑이 가능하지 않을까? 더 발달한 유전자 조작 기술은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싶어했던 또 한 명의 ‘나’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의 과거는 오로지 이기적 유전자의 프로그램이었지만, 문명의 발달은 오늘날 생물학적 욕구를 뛰어넘는 지적인 사랑, 필리아 역시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현재와 과거의 사랑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앞으로 우리가 경험할 미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익숙한 자연과 문명만으로는 설명도, 예측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자 daeshik@kaist.ac.kr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각각 박사후 과정과 연구원을 거쳤다. 미국 미네소타대 조교수,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냈다. 2013~2015년 중앙SUNDAY에 ‘김대식의 Big Questions’를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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