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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인싸] '여야 합의문'의 기구한 운명, 간신히 빛 봤지만 결국 찬밥 신세

중앙일보 2019.07.25 05:00
 
‘여의도 인싸’는 국회 안(inside)에서 발생한 각종 이슈와 쏟아지는 법안들을 중앙일보 정치팀 2030 기자들의 시각으로 정리합니다. ‘여의도 인싸’와 함께 ‘정치 아싸’에서 탈출하세요.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운영위원장실에서 국회 정상화 합의문을 발표하며 '합의문'을 손에 들고 있다. [뉴스1]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운영위원장실에서 국회 정상화 합의문을 발표하며 '합의문'을 손에 들고 있다. [뉴스1]

 여의도 정가에서 빛 좋은 개살구는 ‘여야 합의문’이라는 소리가 있습니다. 여야는 매번 합의문을 도출할 때마다 단어 하나, 문장의 어미 하나 가지고 치열한 논쟁을 벌입니다. ‘합의’냐 ‘협의’냐 ‘처리한다’냐 ‘처리하기 위해 노력한다’냐 등을 놓고서 말입니다. 옥동자를 낳듯 힘겹게 마련한 합의문인데 어느 한쪽이 파기하면 어떻게 될까요? 누군가 책임을 지는 경우는 드물고 대신 비난만 쏟아냅니다. 처음의 신경전에 비해 막상 결과는 초라한 경우도 허다합니다.
 
지난 18일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가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대응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모처럼 머리를 맞댔지만, 당시엔 문안 명칭부터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한국당 등은 '합의'라는 용어 자체에 반대했고, ‘공동선언문’도 너무 무겁다고 해 결국 ‘공동발표문’으로 낙점됐습니다. 근데 이 문구 조율에만 1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회동 직후 “청와대와 민주당은 ‘소재ㆍ부품ㆍ장비산업 육성을 위한 법적ㆍ제도적 지원 대책을 강구하자’는 문구를 넣자고 했는데 한국당은 이게 추가경정예산안과 연관돼 있다며 반대했다. 그래서 ‘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표현으로 대체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공동발표문의 후속 작업인 국회 결의안은 아직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24일 여야가 어렵사리 도출했던 6월 임시국회 의사일정 합의문도 기구한 신세가 됐습니다. 당시는 4월 말 선거제, 공수처법 등 패스트트랙 지정 이후 멈춰버린 국회를 재가동하기 위한 협상이었습니다.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의원총회에서 국회정상화를 위한 교섭단체 3당 합의문이 추인 받지 못한 가운데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의총을 끝내고 의총장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의원총회에서 국회정상화를 위한 교섭단체 3당 합의문이 추인 받지 못한 가운데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의총을 끝내고 의총장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

 
한국당은 게임의 룰인 선거법을 바꾸면서 한국당을 배제하려 한다고 반발해왔습니다. 그래서 문안에 “선거법은 합의 처리한다”는 문구를 넣고 싶어했습니다. 민주당은 패스트트랙 지정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행위는 할 수 없다며 “합의 정신에 따라 처리한다”는 문구를 고수했죠. 민주당이 이 부분을 관철하면서 대신 한국당이 요구해온 ‘경제실정청문회’를 ‘경제원탁토론회’ 형식으로 개최하기로 결론 냅니다.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는 “제 컴퓨터에 20가지 합의문 버전이 준비돼 있다”며 “마지막 버전으로 합의가 이뤄졌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합의문은 2시간 만에 휴짓조각이 됩니다. 한국당 의원총회에서 비토를 놓아서죠. 교섭단체 3당 원내대표들이 이미 다 서명을 했지만, 강제성이 없다 보니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제아무리 집권여당이어도 한국당의 뒤집기를 비난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지난해 12월15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로텐더홀에서' 여야 5당이 선거제도 개혁에 합의'에 대한 소감 발표 전 대화를 하고 있다. 이날 여야 5당이 선거제도 개혁에 합의함에 따라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하면서 단식에 나섰던 손학규 바른미래당, 이정미 정의당 대표은 열흘만에 단식 중단을 선언했다. [뉴스1]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지난해 12월15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로텐더홀에서' 여야 5당이 선거제도 개혁에 합의'에 대한 소감 발표 전 대화를 하고 있다. 이날 여야 5당이 선거제도 개혁에 합의함에 따라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하면서 단식에 나섰던 손학규 바른미래당, 이정미 정의당 대표은 열흘만에 단식 중단을 선언했다. [뉴스1]

 
더 거슬러 올라가 지난해 12월 15일 여야 합의문을 보면 “선거제도 개혁 관련 법안은 1월 임시국회에서 합의 처리한다”고 돼 있는데 7월인 지금까지도 기약이 없습니다. '합의 처리한다'는 문구에 오히려 발목이 잡힌 셈이죠.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선거법 개정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계속하자 이를 중단시키기 위해 부랴부랴 쓴 합의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다 보니 정치권에서는 “이제 여야 합의라는 것 자체가 국민에게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쯤 되면 법원의 판결문처럼 여야가 합의문 내용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국회의원의 세비를 깎는다든지 강제노역을 하도록 하는 ‘강제 조항’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그저 합의했다고 말하기 위한 합의는 국민도 이제 그만 보고 싶을 겁니다.
 
김경희 기자 amator@joo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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